■ 책 소개
다소 유난스럽고 불편한 나와 예민함 사이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공생하는 법
예민한 사람을 소개하는 책은 많다. 그러나, 예민함을 분석하고 극복 방법을 제시하는 여타 책들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예민함을 소개하거나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 예민함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산전수전 다 겪은 현재의 ‘똥글똥글한 내’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보여줄 뿐이다. 책의 초반, 날카로움으로 무장한 저자의 마음이 똥글똥글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 저자 조혜영
숙련된 프로 예민러.
불청객 같던 예민함을 나만의 초능력으로 가꾸기 위해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그 결과 제법 똥글똥글해진 마음으로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작고 평범한 것을 다르게 보는 창의적인 시각에 관심이 많으며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삶을 꿈꾼다.
매일매일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하며, 가끔은 지구의 평화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한다. 요가와 명상을 하며 불필요한 힘은 빼고 필요한 힘을 기르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예민한 사람들의 조금 불편한 초능력
1부 안녕하세요, 예민한 사람입니다
신경이 예민하고 걱정이 많으시네요
깊은 호흡
인생 최초의 기억
나의 세계를 지키는 방법
나 지금 떨고 있니?
멀미의 이유
2부 예민 나라의 소시민
출발선상의 두려움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갈등의 쓸모
맹물의 마음
예민함이 특권이 될 수는 없어
망하는 게 어딨어?
3부 욕망은 어디에나 있다
닮고 싶은 것들
지극히 사적인 두발자전거 도전기
운전면허증은 장롱에 두는 거 아니에요
파리에서 생긴 일 上
파리에서 생긴 일 下
오늘의 비스킷
생선회를 좋아하지만 인생을 날로 먹을 순 없지
단골이 되기는 싫어
친구는 별로 없지만 조문객은 많았으면 좋겠다
4부 고독한 수련가
게으름의 시간
저질 체력자의 이유 있는 변명
운동하는 여자의 근육
요가가 취미에서 수련이 될 때
울렁증이 요가 동작에 미치는 영향
진짜 소중한 것은 말하지 않겠어
5부 오늘도 무사히 단단해졌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아무래도 이건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야
나댐의 미학
새로운 해시태그
식물을 키우는 마음
인생의 라스트 씬
100%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것
에필로그
나는 아주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예민한 사람입니다
깊은 호흡
예민함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유년기? 아니면 유아기? 혹은 엄마 배 속에서부터? ‘예민(銳敏)’은 ‘날카로울 예(銳)’와 ‘민첩할 민(敏)’ 두 한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어사전에서 ‘예민하다’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크게 세 가지 뜻이 있고,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로 각각 해석이 달라진다.
*예민하다
①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②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
③ 어떤 문제의 성격이 여러 사람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만큼 중대하고 그 처리에 많은 갈등이 있는 상태에 있다.
보통 예민하다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는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된다. 사전적 의미대로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로운 상태가 예민함이라면, ‘언제부터 예민함이 시작되었을까’라는 처음의 질문을 이렇게 바꾸는 게 좋겠다.
나는 무엇 때문에 외부 자극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걸까?
외부 자극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뇌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중뇌에 위치한 편도체 때문이라고 한다. 원시 시대 생존이 유일한 목적이었던 인류에게 편도체는 외부 자극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살아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다.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들의 편도체는 작은 것에서도 쉽게 위험을 감지하고 생존에 대한 공포를 더 많이 느껴 시시때때로 빨간불을 켜대곤 한다. 지금은 원시 시대와 비교하면 아무 때나 빨간불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이 안전해졌는데도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얼굴을 내밀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 첫 호흡을 들이마시던 순간 코끝으로 느껴진 공기의 감각과 낯선 세상의 냄새,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말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만난 세상의 질감은 거칠고 쓰라렸을 것이다. 탄생의 순간 느꼈을 낯섦과 불안감이 지금 내 예민함의 씨앗이라면 그 순간을 오롯이 다시 느껴보려 한다. 그 순간을 겁내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앞으로의 나를 바꿀 수 있을 테니까.
갓 태어난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면서도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호흡을 자연스레 해내는 것을 보면 생명은 참 위대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호흡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모든 생명은 살아 있는 한 어떻게든 호흡을 하게 된다. 긴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지금도 매 순간 호흡하며 삶을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편도체는 편도체의 일을 할 뿐이다. 편도체가 제아무리 나를 예민하게 만들더라도 편도체가 고장 난 삶은 생각하기도 싫다. 그러니 편도체의 일은 편도체에게 맡기고, 나는 내 일을 해야겠다.
예민 나라의 소시민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늘 애쓰는 사람이었다. 특히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평소보다 더 애를 썼다.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낯선 장소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일을 할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매번 입사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는 느낌이었다. 과도하게 애쓴 탓에 목과 어깨가 딱딱히 굳는 건 일상이다.
사회생활 초창기 때는 함께 일하는 피디나 클라이언트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쉽게 말하면 일 못한다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서부터는 나를 믿고 일을 맡기는 상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이름값을 하기 위해, 받는 돈만큼의 몫을 하려고 애썼다.
이러나저러나 애를 쓰고 살아온 인생이다. 직업인으로서 어느 정도의 노력은 마땅한 책임감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에너지를 무리하게 소비하면서까지 애를 쓰는 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특히나 남들보다 금세 지치고 피곤해지는 나로서는 에너지를 잘 보존하는 것도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잘 지켜지진 않지만 내겐 애씀의 균형점이라는 게 있다. 하루 동안 최적의 상태로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에너지 적정선이라고 할까.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오늘치의 애씀, 그 이상은 쓰지 말자는 다짐이다.
하지만 말이 애씀의 균형점이지, 저울로 재듯 딱 떨어지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일을 ‘하는’ 내가 느끼는 지점과 일을 ‘맡긴’ 상대가 느끼는 지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일을 맡긴 상대와는 별개로, 더 잘 해내려는 욕심에 무리하게 균형점을 넘어설 때도 있다.
일할 때의 육체적, 심적 피로도를 과학적으로 측정하여 한계치로 정한 수치를 넘어서는 순간 ‘삐’ 하고 경보음이 울린다면 어떨까. “자, 이제 애씀은 여기까지. 더 이상 애쓸 필요 없습니다.” 경보음과 함께 다정한 목소리의 안내음이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면 안심하고 노트북 전원을 꺼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맡은 일을 잘 해내려는 마음이나 책임감을 느끼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건강한 수준의 프로 의식은 분명 권장할만한 덕목이다. 문제는, 애씀의 근원에 프로의식이나 책임감이 아닌 열등감이 교묘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결핍됐다 여기는 부분을 과도하게 메꾸려는 마음이 늘 문제의 주범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상대의 마음에 들고 싶은 마음, 완벽하게 해내려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들은 대체 왜 나타나 나를 힘들게 하는 걸까?
대게는 과장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잘 해내고 말겠어’,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며 새끼발가락까지 힘을 주는 것이다. 처음부터 ‘짠’ 하고 나의 존재감을 보여주려는 전략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전략이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정한 애씀의 균형점을 넘어서며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피드백을 받을 확률은 늘 있다. 좋은 피드백을 받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마음일 뿐이고 상대의 마음은 다를 수 있으니까. 상대의 선택과 판단까지 내가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의 차이일이라조 좋지 않은 피드백을 받을 때는 마음이 상한다.
본래의 의도, 그러니까 상대의 마음에 들고 싶다는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면 다음 스텝에서는 더 애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빠져나올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제 발로 걸려드는 꼴이다. 생각만 해도 피곤한 일이다.
운이 좋아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더라도 기쁨은 잠깐일 뿐,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애씀’의 필연적 속성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오랜 시간 동안 애를 쓰면서 에너지를 바닥까지 소모하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씀’은 그 안에 ‘부족함’이라는 어둠을 품고 있다.
과도하게 애쓰지 않으려면 잘해서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미움받을 용기까지는 없더라도 예쁨 받고 싶은 욕망은 내려놓자.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타인에게 인정받아야만 존재감이 생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만으로 유일무이한, 멋진 사람들 가운데 가장 멋진 존재다.
그러니 이제 애쓰지 않으련다. 애쓰지 않겠다는 말이 대충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실수해도 괜찮아.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같은 말들로 무리하게 애쓰는 마음을 상쇄시켜서 불필요한 힘을 빼겠다는 말이다.
지금의 나에게 가장 최적의 말은 “즐기면서 해, 놀듯이 해” 같은 말들이다. 놀이처럼 즐기는 것이라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놀이라면 애를 쓴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도 않는다. 어린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더라도 애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처럼.
공룡을 좋아하는 어린 조카는 애쓰지 않아도 그 어려운 공룡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다. 보고 읽어도 발음이 쉽지 않은 이름을 술술 말할 때마다 조카의 천재성에 감탄한다.
결국 타인의 인정을 바라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만이 애쓰지 않고도 놀듯이 즐기며 자신의 베스트를 다할 수 있는 법이다.
이렇게 애쓰지 말자고 세게 외치고 있는 걸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애쓰지 않기 위해 또 애를 쓰는 모양이다. 애씀의 강도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시스템은 아니지만 나름의 바로미터가 있긴 하다. 바로 목과 어깨의 경직 상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만의 바로미터가 경보음을 내며 울리고 있는 걸 보니, 이제 글쓰기를 마쳐야 할 시간이 된 모양이다. 과감히 노트북 전원을 끄고 시원하게 스트레칭이나 해야겠다. 오늘의 글쓰기도 끝, 오늘의 애쓰기도 끝.
욕망은 어디에나 있다
생선회를 좋아하지만 인생을 날로 먹을 순 없지
어릴 때는 생선회를 싫어했다. 혓바닥에 닿는 차가운 촉감과 물컹거리는 식감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초등학교 때였던가. 처음으로 초고추장을 찍은 생선회 한 점을 입에 넣었다가 몇 번 씹지도 않은 채 바로 뱉어냈던 기억이 있다. 굽거나 튀기거나 조리면 더 맛있을 생선을, 왜 어른들은 날로 먹는 것인지 그때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생선회의 참맛을 알게 되었는데, (사실 그보다 먼저 소주의 참맛에 눈을 떴지만) 소주 안주에 생선회만 한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막내 작가로 고된 일상을 보내던 시절, 하루의 마감은 언제나 술로 끝나곤 했다. 취하고 씹어야만 그날의 스트레스를 풀고 내일의 태양을 맞이할 힘을 겨우 얻을 수 있었다. 콩알만 한 고료를 받는 처지에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술은 소주, 그리고 포장마차의 저렴한 안주들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식 장소로 가게 된 횟집에서 문득 어떤 결의 같은 게 올라왔다. 엄청난 양의 일에 비해 적절히 계산되지 못한 노동의 대가를 회를 먹는 것으로 보상받겠다는 심정이었다. 회는 삼겹살보다 비싸지 않은가. 음식에 대한 호불호 따위 운운하며 스끼다시나 깨작대고 있기엔 그동안 내가 들인 노동의 시간들이 눈물겨웠다. 투사라도 된 듯 회 한 점을 호기롭게 집어 입에 넣은 나는 얼른 삼켜버릴 요량으로 소주를 원샷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차가운 소주와 어우러진 날것의 식감이 물컹한 게 아니라 탱탱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쫄깃했다. 혓바닥에 착착 달라붙는 찰진 느낌이 좋았고, 씹을수록 고소했다. 초고추장 말고 와사비에 찍으니 회 특유의 고급스러운 맛이 입속에 퍼졌다. 그렇게 그날, 나는 미처 돌려받지 못한 노동력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이 회를 먹고 또 먹었다. 생선회와 함께 마시는 소주는 그야말로 이슬 같았다.
놀라운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늘 술이 안 깨 찌뿌둥하게 일어나던 평소와 달리 맑은 정신으로 벌떡 일어난 것이다. 역시, 소주는 좋은 안주와 먹어야 한다는 인생 선배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의 나의 ‘최애 음식’은 단연코 생선회였다. 굽거나 튀기거나 조려 먹는 생선보다 날로 먹는 생선이 제일 맛났다. 값비싼 생선회를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맘껏 사줄 수 있따면 성공한 인생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미치도록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성공 스토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굿 뉴스와 배드 뉴스가 있다. 배드 뉴스를 먼저 말하자면, 값비싼 생선회를 시시때때로 마음껏 사 먹을 만큼 성공하진 못했다. 다행히 굿 뉴스가 있다. 아니, 굿 뉴스라고 하기엔 살짝 애매하지만, 나이를 먹어 체질이 바뀌었는지 차가운 회를 먹으면 아랫배가 살살 아파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됐다. 언젠가부터 술도 몸에 잘 안 받는다. 그러니 이제 생선회를 마음껏 사 먹을 정도로 성공하진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로 먹는 맛’의 유혹에는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생선을 날로 먹기 좋아하더니 이제는 인생을 날로 먹으려 하는 거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좋은 결과를 얻으면 좋겠다. 많이 먹고 운동하지 않아도 살이 쏙 빠졌으면 좋겠다. 일하긴 싫은데, 돈은 많았으면 좋겠다. 로또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움켜쥐고 싶다. 어쩐지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돈만 있다면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도 기적처럼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방 안에 항상 돈이 굴러다닌다면 한껏 너그럽고 대범해진 마음으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돈을 척척 건넬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람 많고 지저분한 도미토리에서 웅크려 자는 것이 아니라 호텔 스위트룸에서 편히 잘 수 있으니 예민해질 상황도 한결 줄어들지 않을까.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싶을 때 마음껏,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돈과 시간과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대로 나의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나의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자유이자 권력이다.
나도 돈과 시간과 사람, 그 모두를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힘을 갖고 싶다. 이 모든 것을 이왕이면 노력 없이 저절로 얻고 싶다. 날로 먹으려 하는 마음을 두고 사기꾼 심보라고들 말한다. 땀 흘려 노력으로 얻은 것만이 진짜라고 한다. 하지만 땀 흘려봤자 땀 냄새만 나고 끝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마도 땀 흘리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깨지고 부딪히는 일들이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내 소중한 인생을 날로 먹을 수는 없지.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맛있게 구워 먹고 튀겨 먹고 조려 먹을 수 있을까. 내가 가진 삶의 재료들을 요리해 최고의 진짜 맛을 낼 수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벌써 토요일 오후가 지나가고 있다. 늦기 전에 로또나 사야겠다. 요리할 땐 요리하더라도, 로또는 로또니까.
오늘도 무사히 단단해졌다
100%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것
열두 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피곤하다고 해서 하루 절반의 시간 동안 잠을 자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무언가 붙잡고 있던 마음의 끈을 툭 하고 내려놓았던 모양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오래 누워 있던 탓에 몸이 살짝 무거웠지만 금세 개운해졌다. 어젯밤 잠들기 전과는 세상의 공기가 사뭇 달라진 것도 같다. 어제까지의 삶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진다.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이 모두 지워진 채 지구에 방금 도착한 여행자가 된 기분이다.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밤새 비가 내린 덕분에 촉촉해진 흙냄새가 기분 좋게 코를 자극한다. 살갗에 닿는 바람이 상쾌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빛은 머금은 듯 평소보다 더 선명하다. 나뭇잎들이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채도와 명도가 다른 녹색으로 각기 변주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폐가 한껏 부풀어 오른다. 방금 마신 커피 향기가 혀끝에서 진하게 느껴진다. 눈앞의 세상이 전보다 천천히 흐르고 있다. 언젠가 한번은 경험해본 것도 같지만 확실히 다른 감각이다. 세계의 층이 미묘하게 열리고, 닫혀 있던 대기에 틈이 생긴다. 그 고요한 틈 속으로 의식이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사진작가라면 사진을 찍을 것이고, 화가라면 그림을 그릴 것이다. 시인이라면 시를 쓰겠지. 재주가 없는 나는 어쩌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글을 써 보기로 한다.
이 향기와 색채, 빛과 질감, 섬세한 마음이 일렁임을 제대로 표현할 재간이 없다. 글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실제를 100%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내가 지금 이 세계를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느낌들을 어떻게든 백지 위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 언젠가 오늘의 글을 다시 읽게 될 때 지금의 세계가 다시금 눈 앞에 펼쳐질 수 있도록, 이 느낌을 몸으로 다시 기억해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남은 모든 날 동안,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게 되겠구나.
그러게, 점점 자유로워지겠구나.
이것은 의지나 다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현현(顯現) 같은 거다. 그동안의 긴 방황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렇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내가 사랑한 오늘의 세계와 순간의 느낌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유한한 법이다. 그래서일까,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떤 슬픔을 동반한다. 사라져 버리기에 슬픈 것이고, 슬프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예민한 촉수를 세워 세상을 감지하고, 섬세한 움직임으로 연필심을 뾰족이 깎는다. 할 수만 있다면 무공의 원리를 터득한 검객처럼 우아하고 정확하게 100%의 언어로 오늘 내가 느낀 감각을 표현하고 싶다.
오늘도 오늘치의 슬픔과 기쁨으로 삶을 살고 글을 쓴다. 세상의 슬픈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을 기록하고 싶어서. 한동안 내가 지구별에 살았다는 것을 누군가 한 명쯤은 기억해주길 바라며, 오늘 나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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