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탄생
가마솥부터 용광로까지 대한민국 최전선 ‘부산’의 탄생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도시, 부산에는 항상 활기가 넘친다. 인구 약 340만의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은 그 탄생부터 현재까지 잠시도 쉰 적이 없다. 작은 한반도 끝에 자리한 항구도시 부산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자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개항기의 부산은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근대 문물의 거센 파도를 맞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까운 위치 탓에 부산에 터를 내린 일본인들 틈에서 설움을 견뎌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톱질하듯 밀고 당기는 전쟁통에 밥그릇만 겨우 챙겨 떠밀려 내려온 피란민들을 받아들이고 피란수도로 기능한 장소도 부산이었다.
부산(釜山)은 그 이름처럼 우리 대한민국의 가마솥이 되어 주었다. 가마솥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아주 특별한 도구였다. 뜨거운 장작불에 달궈진 가마솥은 그 안으로는 누룽지를 끓이고 밖으로는 방을 덥혔듯이, 부산 또한 역사의 중대한 순간마다 외부의 뜨거운 변화와 아픔을 끌어안고 더운 숨을 뱉었다.
“굳세어라 부산아”, 부산은 대한민국을 비추는 거울
한반도 동남쪽 끝에 위치한 부산은 어떻게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제1의 무역항이 되었을까?
부산의 위상은 어느 날 갑자기, 운 좋게, 어쩌다 보니 높아진 것이 아니다. 부산의 지리적 특성과 퇴적된 시간, 그리고 그 공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역사가 모여 지금의 부산이 만들어졌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6·25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빗속을 뚫고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을 임시수도로 공포했다. 부산이 도합 3년 가까이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는데도 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없다.
연구자들은 ‘임시수도’ 대신 ‘피란수도’라는 용어를 쓸 것을 제안했는데, ‘임시’라는 말에는 수도는 당연히 서울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시절 부산은 대한민국이 절벽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막다른 최전선’이었다. 비록 군사적 전선은 아니었지만 정치, 행정, 문화, 교육의 최전선이 부산에서 형성되었다. 부산에서 땀과 피를 흘린 결과로 전쟁은 종결되고, 서울로 환도할 수 있었다. 피란수도가 부산에 남기고 간 숙제는 너무 많았다. 작은 체구로 힘겹게 수십만의 피란민을 업은 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부산의 심정은 여러모로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는 중앙정부 부처 일부를 세종시로 분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분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서울 공화국이다. 웅숭깊고 무구한 역사를 듬뿍 품은 부산을 비롯한 지방의 역사를 단지 ‘일부의 역사’로 치부하며 뒷방 신세로 미뤄둬서는 안 될 일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서울뿐 아니라 치열했던 지방사의 조각들이 모여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상으로 난 문을 활짝 열었던 부산! 이곳에 가 보면 지금도 구석구석에서 그때 그 시절의 상처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부산은 매 순간 기죽지 않고 다시 우뚝 일어섰기에, 깊이 패인 옛 상흔을 어루만지면서 미소를 머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마! 부산 아이가!”
“복병산 기슭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피란민들은 사십계단을 힘들게 오르내려야 했다. 일제가 산을 절개하는 토목공사를 벌인 탓에 급경사가 생겨났고, 이리로 지나다니는 사람을 위해서 사십계단이 조성되었다. 아, 피란민의 삶도 이 가파른 사십계단과 같았다. 어깨에 짐을 진 채로 아슬아슬하게 사십계단을 오르다 보면 저 멀리 부산항 바다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층에 도착할 즈음에는 아무리 삼수갑산을 넘나들던 무쇠다리 함경도 사나이라 한들, 오금이 저리고 맥이 풀리기 일쑤였다. 층층계단에 앉아 먼바다를 보자니 이북 고향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때 어디선가 이웃에 사는 경상도 아가씨가 다가와 애처로이 묻는다. ‘보이소, 와 그라요, 고향 생각나서 그런가 본데 힘을 내이소'”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시작
“경부고속도로는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서 부산시 금정구 구서동에 이르는 고속도로다.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전 구간이 왕복 4차선 도로로 준공되었다.115 서울의 수도권과 부산의 영남권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물류와 교통의 혁신을 가져왔다. 경부고속도로는 국가 경제의 대동맥이자 일일생활권을 상징하는 교통로가 되었다. ‘마이카 시대’, 즉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부른 것도 경부고속도로였다. 이후 정부의 도로 정책은 대동맥과 혈관들이 이어지듯이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에 두고 이뤄졌다. 경부고속도로를 통해서도 부산은 서울을 잇는 제2도시로서 전국적인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집권 후 서울-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했다. 이미 경부선이 깔려 있었고 국도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물류 산업의 대동맥이 되어 주었다.
경부 성장축을 통해 바다와 맞닿은 부산은 ‘수출과 무역의 최전선’으로 입지를 다졌다. 부산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되었고, 신발과 섬유산업으로 달러를 벌어들이면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앞장섰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얘기다.
하지만 그 뒤안길에는 치열하고 숨 가빴던 이야기들이 있다. 우리는 빼곡하게 들어앉은 신발공장 안 여성 노동자들의 사진을 통해 24시간 쉴새없이 가동되던 공장의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2교대로 근무했던 노동자들을 기억한다. 가파른 성장과 화려한 영광 이면에는 고된 노동과 이름 모를 희생이 있었다.
“1978년 컨테이너 수출입항으로 본격적 채비를 갖춘 부산항은 우리나라 수출입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1979년 전국적으로 컨테이너 수출물량 비중이 34.6퍼센트까지 올라갔다. 부산항이 컨테이너 수출 수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8.6퍼센트였다. 컨테이너 수입 수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93.8퍼센트였다.131 컨테이너를 이용한 수출입은 거의 부산항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볼 수 있는 수치다. 경부고속도로와 부산항을 잇는 부산 도시고속도로는 컨테이너를 전국에서 부산으로, 다시 부산에서 전국으로 원활하게 이동시키는 물류체계로 작동하였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미국과의 교역도 매우 유리한 위치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에 편중되었던 무역구조는 부산항의 지위를 ‘굴지의 무역항’으로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60년대 수영강 하구에 고려제강과 태창목재 등 공장이 입주했지만 1970년대까지는 한적한 어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골산을 허물어 삼익비치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1980년대 민락 공원 일대를 메우면서, 관광과 상업의 중심지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수영이 인기 높은 주거 단지로 탈바꿈했다. 이제 수영강 하구의 전통 마을이었던 보리전과 널구지 자리에는 회색 아파트 단지만 무성할 뿐이다. 찰스 버스턴의 사진을 보거나 광안리 모래밭에서 과거의 수영 문화를 어슴푸레 회상해야 한다. 넓은 모래톱이 조성되었던 수영강 하구, 수심이 얕아서 무릎까지 바지를 걷은 채로 조개를 잡던 그 시절을.”
부산의 바다에서, 나를 건져올린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부산은 가마솥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역사의 최전선에 선 부산이 뜨거운 열을 은근한 온기로 전도시키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쏟아지는 외적들의 총탄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 부산이 가마솥이 된 이유는 우리나라 해안가를 괴롭히는 왜구들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골칫거리인 왜구들은 역사의 ‘뜨거운 불’이었다. 이 뜨거운 불을 견뎌야 할 공간으로 낙점된 곳이 삼포(현재의 창원, 부산, 울산)였다. 조선 정부는 날뛰는 왜구들을 안정시키고자 삼포를 열어줬다.”
“부관연락선의 등장으로 조선은 본격적인 근대를 맞이하였다. 부산이 근대 조선의 관문이 된 것도 부관연락선 때문이었다. 부관연락선은 근대의 문화를 싣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건너왔다. 부관연락선에서 내려 첫발을 딛는 곳이 부산항이었으므로 일본인은 물론이요, 서양인들도 부산을 통해 조선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부관연락선이 취항함으로써 부산은 식민지화의 아픈 길을 걷게 된 동시에 국제적인 관문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이렇게 근대는 제국과 식민의 등에 업혀 조선으로 왔으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오늘날 부산을 떠올리면 여름 피서객으로 가득한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 시끌벅적하고 분주한 국제시장, 그리고 종일 큰 선박이 바쁘게 오가는 부산항의 이미지가 늘 함께 한다.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곳엔 예외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힘 있고 거친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 뒤로는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가 보이는 듯하다.
삶은 늘 복잡다단하며 하나로 정의되기 어렵다. 세기를 거슬러 조선시대에도 삼포개항 이후 물밀 듯 들어온 왜인과 조선인 간에 이 평화가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긴장도 있었지만, 형제, 이웃처럼 지냈던 모습이 공존하였고, 근대로 무장한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던 전근대의 조선 한켠에는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고자 했던 의지가 드러나는 ‘초량왜관’이 있었다.
“근대의 교통수단은 시공간을 축소시켜 멀고도 먼 일본을 가깝게 만들었다. 조선에 오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항하고자 하는 조선인들도 크게 늘었다. 부관연락선은 염상섭이 쓴 근대소설 『만세전』에도 등장한다. 부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 주인공 이인화는 ‘부산을 조선의 축소판’이라 말하였다. 덧붙여, ‘부산의 팔자가 조선의 팔자요, 조선의 팔자가 곧 부산의 팔자’라고 하였다. 그렇다. ‘부산의 운명은 곧 조선의 운명’을 상징할 정도로 부산은 그야말로 조선을 집약시킨 축소판이었다.”
“부산 거류지의 일본인은 마치 지배자처럼 행동하였다. 정작 주인이 되어야 할 조선인은 피지배자처럼 착취를 당하였다. 경제적 종속관계가 조선인을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추락시킨 것이다. 막대한 현금을 보유한 일본인은 거류지 외에 주변 토지를 마구 사들였다. 조선인은 일본인에게 가옥과 토지를 저당잡힌 채 고리대금으로 돈을 빌렸다. 그러나 종국에는 비싼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여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큰 흐름의 역사는 물살 한 번에 작은 것들을 휩쓸고 지나가버리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남아 있는 건축물과 유물들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일제 치하에서 부산은 근대 도시로 거듭났지만 가난한 조선인들은 소외되고 쫓겨났다. 그러나 산비탈과 변방에서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거대한 억압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들불처럼 번졌던 독립만세의 함성은 현대로 이어져 어둡고 암울했던 유신체제 아래 민주주의를 외치는 함성으로 메아리쳐 돌아왔다.
“부산의 6월 항쟁은 일찍이 꾸려진 강고한 지도부를 기반으로 전국의 민주화운동을 모범적으로 선도했던 투쟁이었다. 그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약한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는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민주화 투쟁의 역량을 쌓았다. 그뿐만 아니라 인적·조직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투쟁의 최전선에서 기폭제가 되었던 부산의 6월 항쟁은 부산 시민의 민주주의 정신을 고양한 학교이자 우리나라 대통령까지 잉태한 역사의 자궁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난 역사에서 오늘의 아픔을 본다. 그리고 과거의 이들이 어떻게 역경의 파도를 넘어왔는지 그들의 눈빛과 목소리를 마주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용기와 희망을 건져 올린다.
“옛 우물에서 새로운 물을 긷는다(舊井新水)”는 말처럼, 단연코 부산은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굳건한 힘을 선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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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