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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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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

스탠리의 사랑 이야기

사랑을 찾아 떠나는 시간 그리고 삶 Love3-Way 1
스탠리 지음 | 아마존북스 | 2020년 11월 1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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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지음/아마존북스/2020년 11월/260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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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을 찾는 여정을 떠나다 

 

많은 선인의 말과 철학적 지식, 영적 각성을 통해 깨달은 해답은 신기하게도 사랑이었다. 삶의 진한 내음이 풍기는 그 사랑을 차츰 알게 됐다. 자신의 내면 안에서 울리고, 타인의 말과 행동에서 퍼져 나오는 사랑을 알면서 꼬인 매듭은 풀어졌다. 사랑만이 해결책이라는 것을 저자는 이제야 깨달았다고 한다. 그 사랑을 아는 데는 많은 철학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서 사랑으로 바로 가는 길, 사랑이 어떻게 나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절대적인지 알리려고 한다. 자신 속의 사랑으로의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여행은 즐겁고 행복한 여정이다.

 

■ 저자 스탠리

저자 스탠리의 한국 이름은 이은석이다. 현재 서울 강남 역삼동에서 스탠리 피부과를 운영한다. 의사이자 한의사로 인제대 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수련을 거친 후 다시 경희대 한의과 대학을 졸업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의대와 한의대에서 의술을 익히고 철학과 종교, 영성과 사랑, 사람의 본질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를 이어가는 중이다. 한때는 팝핀을 추는 의사로 알려질 정도로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도전은 사람들의 허물을 덮는 애정으로 이어져서 피부과 진료뿐만 아니라 주름커버를 위한 화장품을 개발하여 특허를 받고, 생산과 판매를 위한 「스탠리스마트커버링」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사랑을 좀 더 많은 이에게 알리고 나누고자 낯선 책쓰기에 나섰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이 ‘허물을 덮는 자’라는 자신의 본질의 이름을 세상에 표현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본질의 이름을 찾을 수 있으며, 그 이름은 사랑으로 가는 시작점과도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정말로 위대하며 절대적이라고 말하고, 모두의 가슴속에 있다고 강조한다.

 

■ 차례

들어가는 말 - 왜 사랑일까?

 

Chapter01 나는 누구인가

01.어두움을 밝히는 빛, 사랑

우리는 왜 이토록 사랑을 말할까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02.이 땅에 머무는 시간, 삶

‘나는 사랑이다!’라고 외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03.나를 찾는 여정을 떠나다

사랑의 에너지를 얻다

진짜 내 이름은 무엇일까

 

04.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다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본다는 것

왜 이토록 ‘참 나’를 찾을까

 

05.사랑과의 만남은 위대한 변화를 만든다

미래는 도착하지 않는다

제자리에 머무는 아름다운 꽃

 

Chapter02 사랑과 마주하기

06.아픈 상처에서 사랑의 관계가 시작된다

꿋꿋이 버티는 건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실에 사랑을 더하면 진실이 된다

 

07.사랑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네 가지 도구

사랑의 이름을 짓는 구체적인 방법

 

08.나를 아는 생각의 힘을 갖추다

수렴과 집중이라는 돋보기로 나를 보다

지성과 영성의 경계에서 조화를 찾다

 

09.사랑은 최선의 나를 만든다

나의 이상향을 찾아라

내 미래가 눈앞에 나타나다

창의성은 어디서 나올까

 

10.사랑은 약속 없이 찾아와 나의 존재를 바꾼다

사랑의 날개를 달다

늑대소년은 인간일까 늑대일까

 

Chapter03 사랑은 무엇인가

11.사랑의 문이 열리다

BTS가 알려준 사랑의 열쇠

사랑의 열쇠는 이미 내 안에 있다

 

12.모든 사람은 사랑이 뭔지 알고 있다

바이올린의 선율이 아름다운 이유

총성을 멈춘 사랑, 왕위를 버린 사랑

13.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다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랑

사랑이 머무는 집이 된다는 것

 

14.나에게서 사랑이 흘러나가다

사랑은 스스로 흐른다

서로의 사랑이 한곳에서 만나다

 

15 영원한 삶에 이르는 길, 사랑의 3-way

사랑의 3-way란 무엇인가

인류라는 공동체에서 사랑의 3-way의 가치

 

Chapter04 사랑과 동행하기

16.My Self, Love Self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

My Self에서 Love Self가 드러나다

 

17.어두움은 사랑의 빛을 드러낼 뿐이다

어두움은 숙명이 아니다

내가 아닌 것을 벗겨내다

 

18.사랑, 현실을 바꾸는 현재진행형 동사

껌팔이에서 성악 가수로

사랑은 자신의 신념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19.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사랑

뉴 노멀 시대의 희망의 불씨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계가 만들어지다

 

20.‘사랑과의 동행’으로 우리의 삶을 완성한다

유한한 삶, 사랑을 배울 귀중한 기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사랑

 

나오는 말 -  ‘사랑과의 동행’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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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지음/아마존북스/2020년 11월/260쪽/15,000원


나는 누구인가

어두움을 밝히는 빛, 사랑

사랑은 달콤하면서도 쓰다. 환희의 나날을 지내게 하다가도 불면의 밤을 지새우게 한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랑이다. 어떤 이는 고통이 없는 사랑은 팥 없는 찐빵이요, 잉크 없는 만년필이라고 한다. 고통과 행복의 변주를 끊임없이 오가는 사랑, 그러나 떼어놓고 살 수도 없는 게 사랑이다.

 

연인 간의 사랑에서만 나를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랑은 종이에 물 스며들 듯 찾아왔다.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지낼 뿐이다. 그러다가 너무 메말라 바스러지는 종이처럼 사랑이 없는 인생은 삭막하고 부서지는 고통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때 사랑을 절실히 갈구한다. 타는 목마름을 겪고 나면 무엇이 자신을 목마르게 하는지 저절로 몰두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실체에 좀 더 다가선다.

 

괴테는 “사랑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인생을 모르거나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랑, 그리고 사랑으로 인한 고통의 뿌리를 더듬다 보면 날것 그대로의 자신을 좀 더 알게 된다.

 

우리는 왜 이토록 사랑을 말할까

과연 우리는 사랑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달콤하게 나누는 연인의 사랑 말고도 삶의 곳곳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입에 올린다. 지독한 아픔과 극단의 갈등이 벌어지는 곳에서도 간절히 사랑을 외친다. 전쟁터의 한가운데에서, 혐오와 차별이 벌어지는 갈등의 현장에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어떤 이는 이 시대를 불행의 시대라고 한다. 그토록 사랑을 찾으면서도 증오와 절망의 절규도 함께 터뜨린다.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아예 저주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이냐는 한탄이 넘쳐난다. 나와 사회가 모두 불행한 시대. 정녕 이 세상은 살 만한 것일까? 이 시대만 이토록 불행하고 사랑은 찾기 힘든 것일까. 그래서 사랑을 애절하게 부르짖는 걸까.

 

야만과 체념의 시대에서 지성적인 삶조차 사치일지도 모른다. 지성이 말하는 관용과 사랑의 메시지는 홍수처럼 쏟아져나온다. 그러나 그 말은 공허하게 들릴 때가 많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휩쓰는 동안,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페스트가 발병한 한 도시를 그린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백색 실명이 퍼지면서 벌어지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이야기가 결코 허구가 아니었다. 관용과 사랑보다 각자도생의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이런 현실에서 지성적으로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게 그리 와닿지 않을 테다.

 

질병의 공포가 아니더라도 현실은 차가운 냉동고와 같다. 지적 허영과 과시, 스펙 우대와 생존경쟁의 사회다. 서로 안아주기보다 차이와 차별을 내세우니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왠지 촌스럽게 여겨진다. 세상과 현실을 모르는 순박함이랄까. 더군다나 요즘은 사랑마저도 자기계발의 논리로 배우고 써먹는다.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기술 정도로만 여긴다.

 

사랑은 흔히 ‘관계’에서 발생한다. 나와 다른 사람, 내가 아닌 누군가와 사랑을 주거나 받는다. ‘자기애’도 따지고 보면 ‘나’와 ‘너’의 관계다. 내가 나를 바라보고 사랑할 줄 아는 게 자기애이지 않은가.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자신을 보듬고 상처를 어루만지며 자신감을 심어주는 등 끊임없이 자신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세상을 사랑의 시선으로 보면,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쉽게 현혹되지 않고 마음으로 본다.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지금껏 보지 못했던 숨겨진 아름다움과 아픔 모두를 볼 수 있다. 좀 더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자연과 세상을 차츰 알아간다.

 

홀로 디지털 세상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뜻밖에도 폐쇄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한다. 사실 직접 보고 겪은 게 아니라서 자신의 주관이 과도하게 개입될 때가 많다. 21세기 디지털 세상이라 해도 사람들은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만을 세계라고 여긴다. 당장 인터넷 게시판을 둘러봐도 아집과 독선의 시선을 곳곳에서 마주친다. 저마다 옳다고 우기고, 한 번 광풍이 불면 금세 휩쓸리고 마는 선동의 세상이다. 개방과 연결의 디지털 문명이라지만, 단절과 고립의 현실에 사는 셈이다.

 

고립과 단절을 넘어설 수 있는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관심은 단지 호기심만으로는 생기지 않는다. 존중과 애정이 생겨야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사랑의 시선으로 존중할 때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고립과 단절에서 벗어나 자신과 세계를 들여다볼 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사랑을 내놓았다. 사람은 그 무엇보다 사랑으로 살아간다. 이 깨달음은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진리일지 모른다. 대부분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사랑과 함께한다. 사랑의 결실로 본 생명의 탄생이다.

 

현실에서 어둠을 밝히는 빛, 즉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욕망과 능력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데 부와 명예를 좇은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두운 동굴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보다 사랑을 우선순위로 두고 산다면 부와 명예는 따라온다. 애초에 그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으니 가능하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사랑은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져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다

사람은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일생을 살면서 언제나 시선에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혼자 있을 때도 시선이 존재한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디지털 세상이라 하는 요즘 세상에서도 시선은 무섭다. 과거처럼 소수의 무리가 권력을 틀어쥐고 ‘보는 사람’으로서 시선 권력을 독점하는 것 같지는 않다. SNS의 발달과 보급으로 저마다 서로 바라본다. 시선의 독점이 아니라 만인에게 나눠진 듯하다. 그렇다면 시선의 권력은 해체되거나 혹은 모두에게 분배된 것일까. 혹자는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를 감시하는 시선 권력이 시민에게 돌아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시선의 분산이자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만큼 더 늘어났다는 뜻도 된다. 그 시선에 굴복해 생각과 행동, 나아가 삶의 방식마저 구속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본다는 것

시선은 욕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욕망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이다. 현대인의 욕망은 갈수록 더 커지고 많아졌다. 먹고 자는 것, 성적 욕구에 더해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추가됐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구하려는 게 인간이 가진 욕망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사랑의 힘이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사랑의 힘이 작용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타인을 사랑으로 바라보고 대할 때 선한 영향력이 생긴다. 그런데 어떻게 마구 퍼줄 수 있는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타고난 천성이 착해서? 배려가 몸에 배어서? 남을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부터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본질에서 사랑을 찾은 사람, 이런 사람은 시선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다. 오로지 자신의 사랑에 따라 남을 돕는다. 뭔가를 바라거나 시선을 의식하고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

 

자신을 진정성으로 바라본다는 것. 그건 또 무슨 말일까. 아마도 자기 스스로가 욕망이나 시선의 포로였다는 것을 외면하지 말고 정면으로 바라보라는 뜻일 테다. 이 또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사랑의 눈을 갖췄을 때 비로소 생긴다. 용기가 사랑을 선택하게 하고, 사랑이 용기를 북돋아준다.

 

사랑과의 만남은 위대한 변화를 만든다

열심히 살면 살수록 허무함도 커지는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무엇이 이런 부조화를 낳는지 궁금하다. 더 큰 문제는 허무함을 느끼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다. 허무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니 극단적인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세상의 세속적인 기준으로 실패한 자들만 한강을 찾지는 않는다. 갑자기 찾아온, 그러나 오래전부터 내적으로 쌓였던 허무함이 정점에 달할 때 잘못된 선택을 한다.

 

허무한 실존을 구해내려면 본질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즉 셀프가 사랑을 만났을 때, 나의 허무한 현재는 바뀔 수 있다. 갑자기 로또 당첨되듯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뀌지 않을지라도 어제와 똑같은 일상이 오늘은 달라질 것이다.

 

제자리에 머무는 아름다운 꽃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찌 보면 매우 허약하다. 지구에서 모든 종을 압도하고 지배하는 듯 보이지만, 코로나19 팬데믹처럼 한순간에 종말의 위기에서 허덕인다. 온갖 기술과 과학의 발달로 뛰어난 존재인 양 굴지만,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태생부터가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다시 주목받는 소설 《페스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인간을 부조리(不條理)한 존재라고 했다.《페스트》에서는 코로나19로 실감한 전염병의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는데, 이때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죽음은 피하지 못한다. 인간은 늘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고 희망을 품는다. 그 바람을 이루려면, 조리에 맞게 모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거나 영원성을 획득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 그래서 카뮈는 ‘부조리’를 말했다.

 

카뮈의 ‘부조리’는 어찌 보면 희망이 없는 미래가 기다린다는 이유로 허무주의를 연상시킬 수 있다. 그러나 카뮈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애초부터 부조리한 인생이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능력을 갖추고 삶에 충실하라고 말이다. 헛된 미래나 영원의 희망을 품고만 살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의 삶에 충실하려면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타인과의 관계 이전에 나와의 관계가 올바로 성립되어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부터 존중해주고, 스스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내가 아직도 나를 지배한다면, 그 망령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자다가 불현 듯 생각이 나서 이불을 차는 것과 같이 과거의 실수나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삶을 꾸려간다. 아픈 상처와 허물마저도 감싸 안고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 지렛대로 삼는다. 자신을 사랑하니 자책과 자해에 가까운 행위로 스스로를 망가뜨리지도 않는다. 스트레스나 화병의 근원을 제거한다. 일시적으로 기분을 전환하는 것과 다르다.

 

‘참 나’를 찾은 사람은 미래가 두렵지 않다. 덧없는 기대와 비현실적인 희망을 품지 않겠지만, 본성의 실현을 위해 살아간다. 카뮈가 말한 ‘인간다운’ 삶을 산다. 자신을 사랑의 눈으로 보게 되면, 사랑의 존재로 미래를 맞이한다. 사랑을 발견하고, 자신을 사랑의 눈으로 보게 되니 사랑의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사랑도 저절로 찾아온다. 제자리에 머무는 꽃이라 해도 꿀벌이 날아와 꿀을 먹고 수분(受粉)하여 새로운 꽃, 새 생명을 낳는다. 사랑을 얻으려 애쓰고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에고의 부정적인 면모를 벗어버리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다.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을 책임지기 때문에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내 인생을 창조하는 자로서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문이 열리다

‘헬조선’이라는 말처럼 가슴을 아리게 하는 말이 없다. 꿈같은 시간을 보내도 모자랄 청춘의 시간, 그러나 현실이 헬, 지옥이라니 얼마나 서글픈가.

 

청년의 미래가 지워져 버렸다는 이 위기는 현실을 지옥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이대로 지옥의 불길로 내 삶을 던져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실의 지옥을 천국의 삶으로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랑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어울린다. 천국에 가면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하기에 천국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 앞에서 팔자 좋은 사랑 타령을 하자는 게 아니다. ‘참 나’의 사랑은 낭만적이라기보다 삶의 동력을 찾는 것이다.

 

현재의 삶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면, 그 모든 문제를 풀 열쇠를 찾는 첫 번째 시도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나를 만들 용기를 내는 것이다. 헬조선에서 허덕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낮다. 낮은 자존감으로 자신을 수치스럽데 생각하고 못마땅해 한다.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수용해야 한다. 그 수용은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용기가 말이다. 그 용기는 나에게서 시작하지만 퍼지고 퍼져서 온 사회를 변화시킨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눈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나와 사회를 변화시킬 사랑이 찾아온다. 의자가 묵묵히 앉은 이의 무게를 받아들이고 감당하듯, 자신의 사랑의 이름을 감당한다. 모두가, 아니 적어도 절반만이라도 자신의 사랑의 이름을 감당하려고 할 때, 헬조선이라는 지옥은 사라진다. 우리의 그 사랑이 현실에서 천국을 가져온다.

 

사랑의 열쇠는 이미 내 안에 있다

내 인생에서 고난과 어려움은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그때마다 한숨을 내쉬고 무릎을 꿇는다면 다가오는 미래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자꾸만 밀려드는 불행이 멈추지 않고 또다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움츠러드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니체는 그런 운명조차도 사랑하라고 말한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 즉 운명애는 수동적으로 현재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는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피폐한 삶에 순응하면서 불행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채로 살라는 게 아니다. 숱하게 찾아오는 고난과 역경까지도 품으라는 뜻이다. 좌절도, 무시도 하지 말고 그대로 껴안으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저앉지 말고 앞으로 나서라는 주문을 한다. 그게 인간이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면서 책임지는 태도라고 말이다.

 

사랑은 삶의 곤궁을 풀어줄 열쇠다. 삶의 동력, 즉 파워와 에너지는 사랑이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 자신의 본질과 사랑에 빠지면 힘찬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연애 초반 때의 넘치는 사랑처럼 말이다. 사랑에 빠진 나는 어땠는가. 세상을 느끼는 감성이 폭발적이지 않았던가. 연인을 향한 내 사랑이 감히 측정할 수 없는 무한대처럼 느껴지지 않았던가. 운명애의 아모르 파티도 마찬가지다.

 

한계를 지을 수 없는 사랑은 이 작은 몸뚱이 안에 들어 있다. 우주와 맞닿고, 우주 그 자체인 나를 사랑하고 느낄 수 있는 무한의 삶을 살 수 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인생은 두려운 것마저도 훌쩍 뛰어넘게 한다. 그토록 짓누르던 삶의 무게가 솜사탕만큼이나 가볍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누구나 다 경험한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을 때 벌어질 변화도 터무니없는 환상이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아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세상도 나를 사랑한다. 사랑이 모든 것의 열쇠다. 피폐한 삶을 행복, 부, 명예 등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함께하는 삶으로 바꾸는 열쇠이기도 하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열쇠는 자존감이라고들 한다.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가질 수 없다. 주위의 격려에도 정작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자존감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여는 열쇠는 사랑이며, 원하는 모든 것을 여는 열쇠도 사랑이다.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다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랑

사랑의 절대성은 신과 같다. 영혼의 힐러, 즉 치유가로 유명한 맥도날드 베인(Murdo MacDonald Bayne)은 《마음과 몸의 신성한 치유》라는 책에서 “신은 사랑이며, 사랑은 신이다”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우주 전체의 중심이고, 그 중심으로부터 모든 영혼을 통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만물에 사랑은 흘러내린다. “꽃들을 통해서, 동물들을 통해서, 그리고 사람들과 천사들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사랑”은 모두 똑같다고 했다.

 

맥도날드 베인은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와 자신의 참된 본성대로 자신을 영원히 표현한다”라고 했다. 사랑은 자신의 중심에서 흘러나와 자신을, 사랑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존재와 사랑의 본질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사랑을 자연의 모습에서도 찾았다. 사랑은 “광물에서는 결합력이며, 꽃에서는 아름다움이며, 동물에서는 본성으로 표현된다”라고 했다. 이 사랑이 사람에게는 “애정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사랑을 완전히 깨닫게 되면, 존재는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고, 몸 안의 모든 세포는 활기를 얻게 된다”라는 것이다. 또 “사랑 말고는 다른 어떤 힘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하늘과 땅의 진정한 힘이다. 사랑은 영원하며, 모든 곳에서, 항상 현재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라면서 사랑의 위대한 힘을 설파했다.

 

사랑의 실재는 개념이나 논리로 설명하기 이전에 이미 완전하게 존재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유효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은 영원하고 절대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믿지 않는다면 산소로 숨을 쉰다는 것도 못 믿을 일이지 않은가. 사랑은 그 자체로 표현된다. 사랑의 구체적인 형태는 한마디로 정의 내리지 못할 만큼 다양한 생(生)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진리는 내가 알고자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삶에 이르는 길, 사랑의 3-way

‘사랑의 3-way'란 무엇인가

사랑의 3-way는 3단계에 걸쳐 이루어지는 원리이다.

 

1단계는 내면의 ‘참 나’를 인식하는 단계이다. 자신을 아는 단계로 사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과정이다. 자신 속의 ‘참 나’를 인식하고, 그 ‘참 나’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면,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좀 더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고, 또 언제든지 상기할 수 있다. 어두운 에고의 틈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참 나’의 빛을 찾는 작업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를 내어 사랑의 ‘참 나’를 선택하고 수용하는 단계이다.

 

2단계는 인식한 ‘참 나’를 현실에서 발현하는 단계이다. 사랑의 눈으로 나와 주위를 바라보는 단계이다. 비전 보드를 만들고, 나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퍼스널 브랜딩 등의 과정을 통해 사랑의 통찰력으로 내가 인식한 ‘참 나’를 세상에 표현한다. 이때 나의 인생이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업그레이드된다. 날개를 단다는 것은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마치 왕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군림하는 권력자로서의 절대적인 왕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창조하는 ‘창조자’로서의 왕, 또 그 세계를 사랑으로 경영하려는 ‘경영자’로서의 왕을 의미한다.

 

3단계는 사랑의 본질을 깨닫는 단계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고 그 위대함과 절대성을 인식하는 단계이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을 밀어주고 이끌어온 존재가 사실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아는 단계이다. 그 사랑과 영원히 함께하고자 스스로 사랑 안에 녹아 흐르기를 원하는 단계이다. 자신이 그 사랑이 머무는 집과 흐르는 통로가 되겠다고 하며, 빛과 같은 사랑이 넘쳐흐를 때의 희열로 사는 단계이다. 영원한 사랑 안에 머물고, 그 사랑에 온전히 휩싸인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단계이다. 물론 이 집과 통로는 물리적인 형태의 건축물이 아니다. 마음과 영혼의 공간이기에 공간의 제약이 없다. 아니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 아니 온 세계와 위대한 사랑 자체도 아우를 수 있을 만큼 크고 넓다.

 

인류라는 공동체에서의 사랑의 3-way의 가치

사랑의 3-way는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라는 공동체에도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외적인 가치와 내적인 가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외적인 가치는 인류라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우리가 창조해야 할 미래를 말한다. 사랑의 3-way는 모든 종교와 사상을 뛰어넘어 전쟁 대신 진정한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종교가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사랑은 만국 공통의 언어이자 연결고리다. 사랑의 3-way는 서로 대립하는 국가와 민족이 전혀 다른 관점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야를 제공한다.

 

모든 국가와 민족은 사랑의 3-way 원리처럼 각 나라의 사랑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 그 이름을 그 나라의 권위로 인정해주고, 이를 토대로 상호신뢰와 교류, 그리고 상생을 꾀해야 한다. 새로운 국가 간의 관계와 정의가 이때 새로 만들어진다. 사랑이 정치적인 논리와 이익을 감추는 명분으로 오용되기도 하지만, 인류는 본능적으로 사랑을 찾고 사랑에 기댄다. 사랑은 인류가 의지하는 가장 큰 버팀목이자 현실에 발현해야 할 가장 큰 사명이다.

 

사랑의 발현은 개인의 목표이기도 하지만, 그 개인이 모인 공동체인 국가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특히 한국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건국이념의 나라다. 이 ‘홍익인간’의 정신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따라서 한국은 특히나 이 사명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때로는 내가 한국인인 게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사랑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외적인 가치를 담은 사랑의 3-way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이를 인류라는 공동체의 입장인 외적인 가치에 대비하여 내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기계적인 인과응보의 운명론을 뛰어넘는 원리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인과응보의 기계적인 운명론은 사랑의 힘을 가로막는 불행에의 순응, 아니 맹목적인 복종으로 이끈다. 이건 사랑에 역행하는 꼴이다. 물은 흘러야 고이지 않고 썩지 않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물처럼 흘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인 채로 썩는다. 틀에 갇혀 흐르지도 못하고 자신의 불행을 숙명이라 여기며 살 수는 없다. 더 큰 공동체인 민족과 나라, 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의 불행도 더는 숙명이라 여기고 살 수는 없다. 이제는 모두가 새로워져야 한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기계적인 인과응보의 운명론의 폐해는 사라질 수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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