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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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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인구의 힘

무엇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고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가
폴 몰런드 지음 | 서정아 옮김 | 미래의창 | 2020년 08월 | 432쪽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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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인구는 언제나 중요했다.”

 

산업혁명의 시작과 대영제국의 흥망성쇠, 독일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도발, 세계 최강의 슈퍼파워로 부상한 미국, 중동에 대변혁을 몰고 온 아랍의 봄, 일본에서 시작되어 유럽으로 번지고 있는 저성장 기류, 중국의 폭발적인 경제성장,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과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 모든 역사적 현상의 기저에는 바로 ‘인구’가 있다. 인구의 변화를 면밀히 살피다 보면 세계사의 변곡점마다 인구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인구의 미래 빛깔을 회색, 녹색, 그리고 흰색의 감소라는 세 가지로 예견한다. 회색은 노령 인구의 증가를 뜻하는데, 인구의 고령화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먼저 고령인구가 많으면 사회의 폭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 세계는 좀 더 평화로워질 수 있다. 하지만 사회경제적으로 역동성과 혁신성이 줄어들면서 투자를 하더라도 안전상품에 몰린다. 이는 실물 경제와 금융 시장에 차례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두 번째로 녹색은 인구 증가의 둔화와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가 보다 청정한 지구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이다. 즉, 인류가 현재보다 더 잘 먹고 산다 하더라도 수확량을 높이면 남는 토지를 자연 상태로 되돌릴 수 있으며 좀 더 청정한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덜 흰 색은 백인 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이다. 21세기 중반이 되면 영국 내 백인 인구는 전체의 60%, 미국은 전체의 50% 이하로 떨어질 전망이다. 백인이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면서 세계는 다시 한번 인구의 대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본서는 지난 200년 동안의 세계사적 큰 변화에 주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저평가되어 왔던 ‘인구’ 문제를 다룬 최초의 대중서로서, 보이지 않는 상호 촉매제의 역할을 하는 인구의 힘을 역사적 사실과 수많은 통계자료에 기반해 설명한다. 이야기책을 읽는 듯, 쉽고 재미있게 서술한 점이 장점이다.

 

■ 저자 폴 몰런드

영국 런던대학교 버크벡 칼리지의 연구원으로 인구학 권위자이다. 독일과 영국 두 개 국가의 국적을 갖고 있으며 프랑스어를 구사한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런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인구 공학 : 인종갈등과 인구전략 Demographic Engineering: Population Strategies in Ethnic Conflict〉이 있다.

 

■ 역자 서정아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냇웨스트, 크레딧 스위스 등의 외국계 금융기관에서 근무했고, 이화여대통역번역대학원 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활 동 중이다.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술에 취한 세계사》,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그림으로 보는 세계의 음악》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 차례

 

1부 인구와 역사

1. 서문

2. 숫자의 중요성

 

2부 밀려드는 물결: 유럽의 인구 역사

3. 앵글로색슨인의 승리

4. 독일과 러시아의 도전

5. 위대한 인종의 소멸

6. 1945년 이후의 서구: 베이비붐에서 이민자 대량 유입에 이르기까지 191

7. 1945년 이후의 러시아와 동구권: 냉전시대 패배 이후의 인구

 

3부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 몰아친 인구 물결

8. 일본,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 국가: 인구 대국들의 고령화

9. 중동과 북아프리카: 인구 불안정

10.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최종 한계선과 미래 전망

부록: 기대수명 산출 방법/합계 출산율 산출 방법

감사의 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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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몰런드 지음/서정아 옮김/미래의창/2020년 08월/432쪽/18,000원


인구와 역사

서문

역사를 돌이켜볼 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삶은 열악하고 야만적이며 짧았다. 이를테면 스페인 포도주 생산 지역의 농가 같은 경우에는 해마다 농번기가 닥치면 어린아이를 둔 여성을 비롯한 모든 일손이 동원되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악취 나는 기저귀를 찬 채로 홀로 울고불고 배고파하는’ 상태로 방치되곤 했다. 혼자 남은 아이가 집 안팎을 돌아다니던 닭에게 눈을 쪼이거나 돼지에게 손을 물어뜯기거나 ‘불구덩이에 떨어지고 (…) 무심코 문간에 놓아둔 양동이와 물통에 빠져 죽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러니 18세기 스페인에서 첫돌을 맞이하기 전에 목숨을 잃은 영아가 25~30%에 달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피레네 산맥 너머 프랑스의 (인구 과반수를 차지하던) 일반 농민 역시 그리 나을 것 없는 삶을 살았다. 대부분의 오두막에는 창문이 없었고 바닥은 침대 역할을 하는 투박한 천과 지저분한 양털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 위에 ‘쇠약한 노인, 신생아, (…) 건강한 사람, 환자, 죽어가는 사람’이 나란히 누웠고 방금 죽은 사람이 그 옆에 방치될 때도 많았다. 이처럼 불결하고 궁핍한 생활상은 1만여 년 전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래로 지구상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볼 수 있었다.

 

오늘날 세계 대다수 지역의 농촌 생활은 18세기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시골 주민들이 살았던 삶과는 판이하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 선진국의 도시에서조차 비참한 생활이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개선되었다.

 

19세기 초를 기점으로 대부분의 지역에서 물질적 환경, 영양, 주거지, 건강, 교육이 크게 개선된 것은 분명 경제적인 현상이었지만 인구학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성년기까지 생존할 확률, 그때까지 생존한 사람들이 낳을 자녀의 숫자, 사망하는 나이, 다른 지역이나 나라나 대륙으로 이주할 가능성 등과도 관련이 있었다는 뜻이다. 생활수준 향상은 인구 데이터와 그 가운데서도 출생률과 사망률에 반영된다.

 

영아나 유아가 사망하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고 거의 모든 출생자가 최소한 어른이 될 때까지는 생존하는 데 따른 결과다. 그 이외에도 기대수명이 대체로 연장된 것도 차이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여성들은 교육과 선택의 수단을 제공받으면서 전보다 자녀를 적게 낳고 있다. 현재의 정치, 경제, 사회가 과거와 속속들이 다르듯이 인구 역시 그때와 매우 다르다.

 

이러한 추세는 1800년경에 영국제도와 미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유럽으로 확산되더니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아프리카의 대다수 국가는 여전히 과도기를 거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순조로이 진행하는 중이다. 손 씻기 확산, 수질이 개선된 식수 공급, 임신이나 출산 시 필요한 기본적인 의료 조치, 건강과 식생활의 전반적인 향상을 비롯하여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다양하게 결합되어 이루어진 성과다. 그러니 교육이 없었다면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200여 년에 걸쳐 진행된 인구 혁명은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인구 혁명은 국가의 흥망성쇠나 권력과 경제의 대대적인 전환에도 관여했을 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인구 혁명의 이야기는 한 세대 만에 낳은 자녀 대부분이 성년기 이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영국 여성들의 이야기이자, 평생 한 번도 아이를 낳아본 적 없이 아파트에서 고독사하는 일본 노인들의 이야기이자, 기회를 찾아 지중해를 건너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십억 명의 삶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으며 세계가 70억 명을 넘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 인구를 어떻게든 부양하고 있다고 해서 인구 물결의 어두운 부분을 외면할 수는 없다. 서구 세계는 수많은 사람이 초년기를 무사히 넘겨 생존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이룰 수 있게 된 환경을 조성한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러나 이처럼 굉장한 업적 때문에 사회적 소외, 비유럽인을 상대로 자행되어온 인종 학살, 미 대륙에서 태즈메이니아까지 이어진 원주민 절멸, 흑인을 일회용 소모품처럼 취급했던 산업 규모의 대서양 노예무역 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숫자의 중요성

인구의 대변혁

지난 200년 동안의 변화가 얼마만큼 철저하게 혁명적이었는지 가늠한다면 인구학을 장기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기원전 47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로마 공화정의 종신 집정관에 임명되었을 때 로마의 영토는 현재의 스페인에서 그리스, 멀리 북쪽에 있는 프랑스 노르망디와 오늘날 30여 개국이 자리 잡은 지중해 연안 대부분으로 확장되었다. 이 광대한 영토의 인구는 대략 5,000만 명으로 그 당시 세계 인구였던 2억 5,000만 명의 20%에 해당했다. 그로부터 1,800여 년 후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의 왕위에 오른 1837년, 세계 인구는 카이사르 당시보다 4배 성장한 10억 명대에 달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이후 200년도 되지 않아 세계 인구는 7배 더 성장했으니 10분의 1기간 동안에 2배 가까이 성장한 셈이다.

 

1819년 빅토리아 여왕이 태어났을 때 호주에 사는 유럽인은 소수(대략 3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당시 호주 원주민의 숫자는 불분명하지만 30만 명에서 100만 명 사이로 추산된다. 빅토리아 여왕이 20세기 초에 세상을 떠났을 때 호주 원주민의 숫자는 10만 명에 미치지 못한 반면 유럽 출신 호주인은 80년 전보다 자그마치 100배 성장한 400만 명이 이르렀다. 오세아니아 대륙 인구의 규모와 구성은 고작 한 사람의 생애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에 크나큰 변화를 겪었다. 그로 인해 호주에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속속들이 일어났다.

 

빠른 인구 성장 속도와 선택적인 가속화, 영아 사망의 급감, 19세기 유럽 인구의 대량 이탈 등과 같은 놀라운 사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는 모두 산업혁명에 뒤이은 근본적인 사회 변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역사의 흐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인구변화 추세와 다른 곳의 희생으로 더 큰 힘을 얻은 나라와 공동체가 생겨났고 경제와 제국의 운명이 정해졌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의 근간이 형성되었다.

 

인구의 영향력

인구 물결이 없었다면 역사적 사건 가운데 상당수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역사적 가정에 불과하지만 19세기 인구 폭발이 없었다면 영국이 호주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의 광활한 영토에 식민지를 세울 수 없었을 테고 그에 따라 영어의 통용이라든가 자유 무역의 일반화 같은 ‘세계화’ 현상이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20세기 초 러시아의 영아 사망률이 크게 하락하지 않았다면 히틀러의 군대가 끝도 없이 밀려드는 러시아 군과 맞서 싸우다가 패배하는 일 없이 1941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미국이 해마다 수백만 명씩 이민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1950년대 이후에 인구를 2배로 늘리지 못했다면 이미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잠식당했을지도 모른다.

 

인구를 바라보는 관점

이 책에서 논의한 내용과 상관없이 인구 물결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이 책은 분석적이라기보다 역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명시하고자 하는 관점은 두 가지다.

 

첫째, 인간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경이로운 것으로 이를 지키고 연장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어린이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일만도 훌륭한데 영아 사망률이 하락하면서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뜻깊은 일이 일어났다. 한 생명을 잃는 것도 안타까운 법인데 여러 생명을 잃는 일은 어떠한 슬픔과도 비할 수 없다.

 

둘째, 강제적인 산아 제한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불필요하다. 대신 여성에게 출산에 대한 선택권을 넘기면 현명한 결정을 내릴 것이다. 예를 들어, 피임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 스스로 자녀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경제에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듯이 인구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게 된다. 여느 문제와 마찬가지로 인구 문제에서도 교육적, 기술적 수단을 갖춘 일반인이 사회와 지구 전체를 위한 가장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인구학은 삶의 일부이며 어떤 면에서는 삶 그 자체다. 출생, 이주, 결혼, 죽음은 인생의 큼직큼직한 이정표다. 인구학이 그러한 일들을 총체적으로 살펴본다고 해서 인구학의 관찰 대상인 개인의 삶과 경험이 지니는 가치와 고결함이 훼손되지는 않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합계를 내고 일반화하는 특권을 지닌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다루는 숫자가 모든 개개인이 품는 희망, 사랑, 두려움의 총합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의무도 따른다. 

 

밀려드는 물결: 유럽의 인구 역사

앵글로색슨인의 승리

영국이 주도한 인구 폭발

전문가들은 산업 생산의 급성장과 인구 급성장 중 어느 현상이 먼저 일어났는지, 어떤 현상이 원인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인구 도약이 산업 도약을 촉진했든, 산업 도약이 인구 도약을 유발했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두 가지 사건이 동시대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현상은 전 세계를 휩쓸었고 이 나라 저 나라와 이 대륙 저 대륙의 근간까지 뒤흔들었다. 인구 폭발의 첫 번째 결과는 영국인과 유럽인의 세계 정복이었다. 또한 그들이 몰락을 가져오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야말로 인구가 물결처럼 휘몰아쳐다가 잦아드는 과정이었다.

 

영국제도는 인구 혁명이 시작된 곳이다. 우선 이 사건을 어째서 혁명이라 하는지, 그 전에 일어난 일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잉글랜드의 인구 급성장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려면 수세기 전인 16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이때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세의 후반기이자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시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침략을 감행했으나 실패했고 ‘음유시인(the Bard)’으로 불렸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영향력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잉글랜드에는 4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

 

17세기에는 인구 성장 추세가 주춤하더니 내란이 일어나고 흑사병이 돌아오면서 다소나마 감소하는 듯했지만 18세기 초반 들어 인구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전반기의 연평균 인구 성장률은 대략 0.3%였고 후반기에는 0.5%에 가까웠다. 꽤 괜찮긴 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상당히 일반적인 성장률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를 기점으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고 인구 물결은 새로운 경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잉글랜드에스는 인구의 대량 이민에도 불구하고 인구 성장이 가속화하여 연평균 1.33%를 넘어섰다. 연평균 인구 성장률이 1.33%에 이르면 인구가 대략 50년에 걸쳐 2배로 늘어나고 그 다음 50년 동안에도 2배 더 증가한다. 19세기를 거치는 동안 영국의 인구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영국에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이 잇따르면서 식량 생산과 상업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자 인구는 과거의 한계를 훌쩍 뛰어 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인구 규모는 더 이상 현지에서 생산 가능한 식량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공업 국가는 세계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식량을 사들일 수 있는 법이다. 또한 최첨단 농경 기법 덕분에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인구 도약

인구 성장은 왜 일어났으며 어째서 다른 곳도 아니고 영국에서 시작되었는가? 어느 정도까지는 운이 좋아서였다. 유럽 대륙 대부분의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영국은 적어도 1745~1746년에 있었던 자코바이트의 난(Jacobite rising, 왕위에서 쫓겨난 제임스 2세와 그의 자손을 다시 옹립하기 위해 가톨릭교도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내란-역주) 이후로는 전쟁으로 인한 약탈을 겪지 않았다. 흑사병이나 다른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인구가 성장하면 둘 중 한 가지 일이 (혹은 둘 다) 일어나게 되어 있다. 첫째, 출생률이 사망률을 넘어서게 된다. 둘째로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이민이 밖으로 나가는 이민을 앞지른다. 그러나 19세기 잉글랜드의 경우에는 두 번째 가능성은 논외로 칠 수 있다. 오히려 이 시기에 영국과 아일랜드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광활한 대지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사람들을 대량으로 수출했다. 게다가 이 시기 미국에서 최대 규모의 이민 집단은 대부분 영국과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잉글랜드 밖으로 대량 이주가 발생했음에도 잉글랜드의 인구가 한 세기를 거치면서 4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점은 해외 이민을 유발할 정도로 국내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했음을 알려준다. 이는 사망자 숫자를 훌쩍 앞서는 출생자 숫자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영국의 인구 혁명과 더불어 변화한 것 가운데 하나는 평균 혼인 연령이었다. 평균 혼인 연령은 18세기 초에서 19세기 중반 사이에 26세에서 23세로 낮아졌다. 결혼이 빨라졌으니 여성의 가임 능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기간이 3년 더 늘어난 셈이다. 그와 동시에 혼외 출생자 숫자가 감소했다.

 

우리 눈에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도시가 열악해보일지 몰라도 조지 왕조(영국 조지 1~3세 치세인 1712~1837년까지의 기간을 뜻함-역주)를 전후하여 사망자가 속출했던 런던은 물론 이전의 가난에 찌든 마을과 비교하면 이 시대의 생활환경은 크게 ‘향상’되었고 이것이 인구 폭발에 일조했다. 영국은 곡물법(Corn Laws)의 폐지 이후에 곡물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어디든 수지타산이 맞는 곳에서 식량을 수입하여 자국민에게 제공할 수 있었으며 운송 기술의 발달로 수입 가능한 지역이 한층 더 확대되었다.

 

1945년 이후의 서구: 베이비붐에서 이민자 대량 유입에 이르기까지

베이비붐 세대의 탄생

19세기의 전형적인 가족을 생각해보라고 하면 빅토리아 여왕의 어린 자녀 여럿이 다정한 부모를 둘러싸고 당당하거나 장난스러운 자세를 취한 사진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이르자 세금과 자금 면에서 중심지가 대서양 건너편으로 옮겨갔다. 이제 전후 베이비붐이라고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곳은 미국이다. 맬서스 시대부터 높은 출산율과 강력한 인구 성장률로 주목을 받은 미국은 급기야 서구 세계의 인구 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출산율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추세는 전간기에도 이어졌다. 특히 1930년대의 대공황은 출산과 가족 형성에 걸림돌이 되었다. 대서양 양편의 실직 남성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워지자 결혼이나 자녀 계획을 연기했으며, 이미 결혼하여 자식을 둔 사람들은 더 이상 자녀를 낳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1945년부터 모든 예상을 뒤엎은 반전이 일어났다. 미국의 군인들은 전쟁을 끝내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기를 고대하면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전쟁 때문에 결혼과 가족 구성의 계획이 지연되었다가 마침내 실행에 옮겨졌다는 것이다. 미국의 합계 출산율은 전쟁 직전에 2명 남짓으로 하락했다가 1950년대 후반에 3.5명 정도로 상승했다.

 

인구 추세는 개인과 남녀 한 쌍의 수백만 가지 사적인 결정이 한데 모인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인구 추세의 원인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인구 물결을 규명하는 것은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규명하는 일과는 달라서 정확히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의 전후 베이비붐이 일어난 원인을 추론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베이비붐이 오랫동안 지속된 원인 가운데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은 경제적 요소다. 인구 성장과 경제 호황은 때를 잘 만나면 자기 강화적(self-reinforcing)성격을 띤다. 결혼이 늘어나고 자녀가 많아지자 주택 수요뿐 아니라 냉장고, 세탁기, 전화, 텔레비전, 자동차 등 주택과 관련된 제품의 수요까지 증가했다. 소비재 대부분이 미국 내에서 생산되던 시대에 이러한 수요 증가는 경제를 성장시켰고 낙관적인 사회풍토로 이어져 가족 형성과 출산을 한층 더 부추겼다.

 

전후의 경제 호황과 마찬가지로 베이비붐은 미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으며 서구 세계의 전반적인 현상이었다. 캐나다에서는 미국보다 좀 더 강력한 베이비붐이 일어나서 1960년대 초반에는 여성 한 명당 자녀 수가 4명을 웃돌았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대체로 미국의 경로를 따라갔으며, 1930년대 후반에 2명에 불과했던 영국의 출산율은 1960년대 초반에 3명 가까이 올라갔고, 에드워드 왕자가 태어난 1964년에는 정점에 달했다.

 

베이비붐으로 인해 사회는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1950년대의 북미와 서유럽에서는 10대의 시대, 로큰롤 시대, 사상 최초의 제대로 된 대중 청년 문화가 출현한 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곧 청소년기에 돌입할 어린이 인구 집단이 앞 세대 인구를 능가할 정도로 커졌고 사회 관행과 관습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됨에 따라 서구 국가들에는 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베이비붐의 붕괴

1965년경에는 흔히 ‘필 the Pill’이라고 불리게 된 먹는 피임약이 보급되었다. 피임약의 출현은 출산율이 떨어지기 시작한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피임약의 어머니로는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먼저 마거릿 생어는 산아 제한의 선구자로서 산아 제한 운동을 조직하고 주관했으며 널리 퍼뜨렸다. 캐서린 덱스터 맥코믹은 생물학자이자 농기구 기업의 상속녀로서 산아 제한 운동에 자금을 댔다. 이들의 노력은 미국 식품의약청FDA이 1960년대에 먹는 피임약의 사용을 승인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새로운 가족이 새로운 제품 수요를 창출하고 경제를 활성화하며 그 자손이 더 큰 규모의 가족을 꾸리는 식의 (최소한 일부에게는 긍정적인) 선순환이 영원토록 지속될 수는 없었다.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여성 세대가 가정에 안주하여 엄마가 되기보다 고등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는 일이 흔해지면서 페미니즘을 비롯하여 새로운 사회 세력과 규범이 등장했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시야가 확대되고 교육 기회가 늘어났다.

 

교육을 받은 여성이 증가하면 출산율은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개개인의 사례로 볼 때 교육을 받은 여성이 자녀 6~8명을 낳는 일도 있겠지만 사회 전체로 볼 때 여성의 교육 수준과 향상과 대가족은 양립할 수 없다. 베이비붐 세대는 베이비붐을 일으키지 않을 운명이었다.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 몰아친 인구 물결

일본,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 국가: 인구 대국들의 고령화

산업 시대 이전에 대다수 지역에서 그러했듯이 20세기 초반 이전의 일본의 인구 데이터는 불완전한 편이며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대략적인 윤곽 몇 가지는 분명하다. 일본의 인구는 정치가 안정되고 농업 혁신이 일어난 17세기 초반 도쿠가와 시대에 처음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에 세계의 다른 지역은 대부분 인구 면에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일본의 17세기는 그와 대조적으로 평안하고 순조로웠으며 그 결과 인구가 성장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일본의 인구는 2,600~3,300만 명 사이에서 정체되었다. 

 

일본 인구의 오랜 정체에 대해서는 국내 안정과 전쟁 부재 때문에 식량난과 질병 같은 맬서스식 인구 억제 요소가 두루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일본 인구가 18세기 초까지 인구 상한선의 가장자리에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18세기에 일본 동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영아 살해를 어린 벼를 뽑거나 솎아낸다는 뜻의 마비키mabiki 라는 말로 불렀다. 자녀를 많이 낳은 부모는 사회 질서에 반하는 존재로 낙인 찍혔고, 개처럼 새끼를 친다는 비난을 받았다. 농촌의 어느 부유한 상인은 점을 쳐서 살려야 할 아기와 죽여야 할 아기를 결정한 다음에 자기 손으로 아기를 죽인 과정을 일기로 남겼다.

 

1868년에 쇄국 정책이 종말을 맞이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봉건주의 타파와 근대 국가의 탄생으로 불릴 만 한 일들이 뒤따랐다. 처음에는 산업 발전과 인구 발전(인구 전환을 통한 발전)의 속도가 더뎠으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부터 가속화되었다. 1875년에 출생률이 이미 1,000명당 30명을 넘어서서 심지어 36명 남짓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망률도 상승한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다른 자료에 따르면 사망률은 하락하고 있었는데, 이는 인구 전환의 초기 단계에 예상되는 결과에 부합한다. 실제로도 사망률이 하락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산업과 영향력은 일본의 인구 성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앵글로색슨 인구의 성장으로 영국과 미국이 엄청난 우위를 확보하여 세계 대부분을 지배할 수 있었듯이 일본은 인구의 힘과 산업 역량을 두루 갖춘 덕분에 유럽인들에게 ‘강대국’으로 인정받는 위치로 올라갔다. 인구 성장과 경제적, 산업적 영향력이 없었다면 일본은 침략적인 팽창주의를 추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이 인구가 훨씬 더 많은 중국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고 지배한 것을 보면 인구 말고도 다른 요소가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인구 대국 중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까닭은 인구 역동성에 산업 역동성이 결합된 덕분이기도 하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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