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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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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평전

봉오동 청산리 대첩 100주년(2020)
김삼웅 지음 | 레드우드 | 2019년 6월 | 294쪽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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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사)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추천도서

여천 홍범도 장군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온전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

 

2020년은 독립전쟁의 전승을 거둔 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이다. 모두가 기억하는 일제강점기 3대 대첩 중 2대 대첩이지만, 아쉽게도 이 신화의 주역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는 온전하게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산포수 의병장 출신 홍 장군은 용맹함과 기발한 전투력으로 이름을 떨쳤고, 부하와 한인사회를 배려하고 낮은 자세로 각 독립군 부대와의 통합을 자신의 명예보다 먼저 생각했었다. 평양에서 태어났고, 러시아 망명 시절 소련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 이주를 당한 것 등은 천하에 기상을 떨친 그의 행적을 너무 오랫동안 망각 속에 묻어 버렸다.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광복 2년을 앞두고 이역만리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서 외로이 세상을 떠난 홍 장군의 삶을 되짚어 봐야 한다. 개정증보판으로 새롭게 탄생한 이 책은 중국의 봉오동전투 현장과 청산리대첩의 현장인 직소, 청산리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갑오의병 운동부터 게릴라전까지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유일한 의병장이자 일본군이 ‘하늘을 나는 홍범도’라고 부를 정도로 공포의 명장이었던 홍 장군은 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까? 시련과 고난을 벗 삼아 살다간 독립전쟁사의 영웅을 젊은 세대에게 소개한다.

 

■ 저자 김삼웅

저자 김삼웅은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필화사』 『백범 김구 평전』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안중근 평전』 『이회영 평전』 『노무현 평전』 『김대중 평전』 『안창호 평전』 『김근태 평전』 『이승만 평전』 『안두희 그 죄를 어찌할까』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몽양 여운형 평전』 『우사 김규식 평전』 『위당 정인보 평전』 『김영삼 평전』 『보재 이상설 평전』 『의암 손병희 평전』 『조소앙 평전』 『백암 박은식 평전』 『나는 박열이다』 『박정희 평전』 『신영복 평전』 『현민 유진오 평전』 『리영희 평전』 『송건호 평전』 『외솔 최현배 평전』 『장일순 평전』 등이 있다.

 

■ 차례

서문 홍범도 장군 진혼사

 

1부. 청산리의 영웅, 홍범도

1장 출생에서 성장까지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다 │ 조실부모, 젖동냥으로 자라 머슴이 되다 │ 군대 지원하여 3년 동안 나팔수 생활 │ 부패 상관 폭행하고 군문을 뛰쳐나오다 │ 제지공장 3년, 주인의폭압에 다시 탈출

 

2장 파란곡절의 젊은 시절, 의병투쟁 시작

금강산 신계사에서 비승비속의 생활│비구니와 함께 신계사를 떠나다│동지 만나 일본군 소부대 섬멸│산포수와 농민으로 의병대 조직│단양 이씨와 해후, 아들과의 상봉

 

3장 산포수 의병장, 관북 지역 일본군 소탕전

산포수 의병부대 대장으로 뽑히다│일본군과 일진회원 가차 없이 처단│ 일제, 가족 인질 삼아 회유작전 벌이다│부인은 옥사, 아들 양순은 전사│초기 산포수 의병의 혁혁한 전과

 

4장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 오가며 펼친 항일전

한민족의 고토, 간도로 이동│의병가.독립군가로 사기를 북돋우다│연해주로 이동, 안중근을 만나다│‘13도의군’과 ‘성명회’에 참여하다 | 권업회 회장단에 선출돼 항일 지도│봉밀산에서 둔전병으로 장기전 대비

 

5장 대한독립군 창설, 국내진공작전

러시아혁명기 노령 왕래하며 무기 구입│대한국민의회 참여, 군무부 활동│대한독립군 창건, 본격 항일전│항일 연합군 이끌고 국내진공작전 벌이다

 

6장 봉오동전투의 영웅

3.1운동 계기로 독립군 부대 연합전선│봉오동으로 일본군 유인 섬멸│적군 500여 명 살상한 대첩│독립군의 영웅으로 부상하다

 

7장 청산리대첩을 승전으로 이끌다

일제의 보복, 마적단까지 동원│어랑촌에 진지 구축, 연합부대 사령관에 추대│매복 전술로 일본군을 자멸로 몰아넣다│국치 이래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박은식의 청산리대첩 기록│일제 정보기관의 ‘홍범도 평가’│이범석의 청산리대첩 주역 왜곡│“청산리전쟁 주역은 홍범도”

 

2부. 시련 속의 민족혼, 홍범도

8장 일제의 보복 경신참변, 독립군 기반 상실

학살·약탈·소각의 ‘삼광전략’│매장한 시신까지 꺼내 불태우다│5천여 한인 학살 만행│마적단까지 끌어들여 한인을 학살하다│러시아 이동 중 일본군에 타격

 

9장 대종교에 참여하여 민족정신 선양

독립운동과 민족종교의 관계│단군 관련 각종 사서 간행에 참여하다│『단학회보』 발간에 자금을 지원하다

 

10장 좌절의 시기, 레닌·트로츠키와 회견

러시아령 이만에서 무장해제 당하다│‘자유시 참변’, 독립군끼리 총질하다│조정에 실패, 반대 측 병사들 재판관으로│둘째 아들 병사, 적군파 소속 대대장으로│내전 종식되자 입장 바꾼 소비에트 정권│모스크바의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다│레닌에게서 권총 등 선물받다│레닌이 준 선물, 해방 후 ‘배척’의 사유되기도

 

11장 협동조합 일구며 재기 노렸으나

암살 위기 모면, 밀정들에 시달리다│전우들과 농업조합 만들어 둔전 활동│상처 18년만에 이인복과 재혼│소련 정세 변화로 개간한 땅 빼앗기다

 

12장 광복을 2년 앞두고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다

스탈린의 폭거로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극동 러시아 한인 17만여 명 강제 추방│한국어 사용 및 거주 이전 금지 등 탄압│‘전선에 보내 달라’ 간청하다│75세 일기로 거인은 쓰러지다

 

부록 1 홍범도 장군을 추억하면서

전문 연구가들이 바라보는 홍범도│카자흐스탄의 홍범도 관련 자료│‘김규연 비망록’의 홍범도│이인섭의 홍범도 회상기

부록 2 홍범도 항일역전표(1891~1909년)

부록 3 홍범도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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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지음/레드우드/2019년 6월/294쪽/16,000원


청산리의 영웅, 홍범도

출생에서 성장까지

군대 지원하여 3년 동안 나팔수 생활

홍범도가 나이까지 속여 가면서 군대에 지원한 것은 애국심이나 희생정신에서가 아니라 시쳇말로 순전히 ‘생계형’이었다. 아무려면 머슴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평생 동안 의병, 독립군, 빨치산 대장이 되어 무인의 길을 걷는 단초가 될 줄은 그 자신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홍범도는 임오군란 이듬해(1883년) 평양감영의 우영 제1대 소속의 나팔수로 근무하게 되었다. 어쨌든 남의 집 머슴살이에서 군인이 된 것이다. 그것도 군인들이 행군이라도 할라치면 맨 앞에서 나팔을 불어 대열을 인도하는 역할이었다.

 

얼마 뒤부터는 사격술을 배우고 제식훈련도 받았다. 홍범도는 열성을 다하여 사격술에서 발군의 실력을 내보였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는 데다 열성을 바쳐 노력한 성과라 할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평양에 있는 병력 일부를 차출하여 임오군란 이후 혼란해진 서울의 치안과 관청의 경비를 맡도록 했다. 인물과 체력이 좋고 사격술도 우수한 홍범도는 당연한 수순으로 선발되어 서울에서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다.

 

부패 상관 폭행하고 군문을 뛰쳐나오다

홍범도가 4년여 근무하던 군인 생활을 끝내게 된 것이 부패한 장교의 ‘살해’인지, ‘중형을 처벌받을’ 정도의 폭행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극상’ 사건으로 대한제국의 군인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만은 확실하다. 4년여 군인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이후 산포수와 의병 활동, 빨치산 대장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백발백중의 사격술, 각종 전술과 기량이 이때 익힌 것이다.

 

파란곡절의 젊은 시절, 의병투쟁 시작

동지 만나 일본군 소부대 섬멸

홍범도가 먹패장골의 은거 생활을 마치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1895년 9월 18일쯤(양력 11월 4일경), 장안사에서 회양읍과 철원 방면으로 넘어오는 길목의 단발령 고개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한 청년을 만났다. 이는 그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는 혼자서 자기가 지담 선생한테서 서산대사가 임진왜란 때에 금강산에서 떠나서 평양에 당도하여 승군을 모집하여 가지고서, 적군에게서 평양을 해방시키던 말씀 듣던 것을 곰곰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청년이 어디선가 말없이 나타나더니 자기 곁에 다가와 앉으면서 “아! 무엇을 그와 같이 상상하십니까?” 하고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는 황해도 서흥생 장인 김수협이라는 용사였다. 홍범도는 요행으로 천만뜻밖에 만난 그와 지금 자기가 혼자서 생각하던 사실을 일장설화하였다. 그리고 국가가 이와 같이 불운에 처해 있고, 왜놈들이 우리나라 인민들을 되는 대로 학살하는 이때에 어찌 조선의 인민으로 나서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다 죽기를 고대하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김수협은 별말 없이 나 역시 당신 같은 사람으로 큰일을 공모할 동포를 만나지 못하여서 사방으로 다니던 중이노라고 하여, 그들은 같이 ‘의병운동’을 시작할 것을 결정하였다.”

 

산포수와 농민으로 의병대 조직

홍범도가 초기 의병전에 투신하여 일본군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을 즈음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조선 반도는 또 한 번 전쟁터가 되고 있었다.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의 문호를 연 일본은 1894년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를 후원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청나라 종주권을 강화해 주는 결과를 빚었다. 이후 청·일 두 나라는 조선 지배권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다가, 1894년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그 전압을 구실로 조선에 출병함으로써 마침내 그해 8월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더욱 기세등등하여 조선의 산야를 누비면서 항일 의병을 섬멸하고자 이 잡듯이 뒤졌다. 홍범도의 명성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터라 일본군은 그의 행방을 뒤쫓았다. 홍범도는 가명을 쓰고 금광의 인부로 들어갔다. 그러나 은신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군 3명을 처단한 홍범도는 밤길을 걸어 함경남도 덕원의 무달사라는 사찰에 이르렀다. 여기서 며칠 쉬는 동안 덕원읍의 정성준이라는 자가 일본군 정탐이란 사실을 알고 이 자를 처단했다. 정성준은 거액의 일본 돈을 갖고 있었다. 홍범도는 이 돈이 밀정의 대가라고 판단, 군자금으로 압수하여 의병들의 필수품을 구입하는 데 요긴하게 썼다.

 

그리고 산포수와 의병 출신 10여 명을 규합하여 소규모 의병부대를 편성, 평안남도 양덕으로 들어갔다. 이름을 숨기고 때로는 금광의 인부 노릇도 하고 활빈당과 비슷한 의병 활동을 하면서 은거했다. 본격적인 의병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용맹한 군사훈련과 전술·전략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이 기회를 치열한 준비 기간으로 삼았다.

 

대한독립군 창설, 국내진공작전

러시아혁명기 노령 왕래하며 무기 구입

홍범도에게 1910년대 후반은 독립전쟁의 준비 기간이었다. 이제까지 항일전의 양상이 의병전이었다면 앞으로의 전투는 독립전쟁이었다. 의병전은 게릴라식 전투가 불가피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독립전쟁의 성격으로 바뀌게 된다.

 

본격화되고 있는 독립전쟁을 내다보면서 홍범도는 봉밀산을 근거지로 삼아 농사일과 수렵 그리고 군사훈련으로 2년여를 보냈다. 그러다가 1917년 11월 초, 봉밀산보다 한국과 가까운 러시아령 추풍 다아재골로 근거지를 옮겼다. 봉밀산 지역이 적에 노출되면서 더 이상 머물기가 어려웠기도 했고 다아재골로 옮기는 데는 정세의 변화도 있었다.

 

러시아혁명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 통치에 신음하고 있는 각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아처럼 받아들여졌다. 1920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레닌은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렇게 레닌 정부가 식민지 해방투쟁을 지원하게 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도 큰 영향을 받았다. 홍범도는 당장 항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간도보다 러시아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기는 것이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적중하지 않았다. 극동 러시아의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 창건, 본격 항일전

홍범도가 대한독립군을 창건한 것은 이와 같은 내외의 정세 속에서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준비하면서 기다렸던 기회였다.

 

“1919년 3월 중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의 근거지였던 연해주 수이푼 다아재골에서 권업회의 라자구 사관학교 학생들과 홍범도의 옛 동지들, 그리고 북간도 훈춘 출신의 황병길·이명순·최경천 등이 간도에서 데리고 온 군인들을 기초로 400여 명의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 가운데 홍범도 계열의 숫자는 1/4 수준인 100여 명으로 판단된다. 대한독립군은 노령 지역 독립운동 영도기관인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병력을 기초로 창건되었다.”

 

홍범도 의병부대에서 발전한 대한독립군은 백두산 기슭의 북간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근거지를 설치하자마자 1919년 8월부터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오랜 소망의 하나였던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국내진입작전을 대담하게 감행한 것이다. 대한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서 1919년 8월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공해 들어가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섬멸했다.

 

이것이 3.1운동 이후 독립군 단체들의 독립전쟁 중에서 최초의 국내진입작전이며, 이 중요한 업적을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이 수행해 낸 것이다. 이러한 국내진입작전은 대한독립군이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홍범도 의병부대에서 발전 편성된 독립군 부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국내진입작전은 계속되었다.

 

봉오동전투의 영웅

봉오동으로 일본군 유인 섬멸

대부분의 큰 사건들이 그러하듯이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불리는 봉오동전투 역시 처음에는 작은 작전에서 비롯되었다. 1920년 6월 4일 새벽 독립군 부대 30여 명이 함경북도 종성 북방 5리 지점의 강양동으로 진입하여 일제 헌병순찰대를 격파하고 두만강을 건너 무사히 귀환했다. 자주 있었던 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이었다.

 

일제는 이 패배를 설욕하고자 남양 수비대 소속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를 동원하여 독립군의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삼둔자에서 독립군의 반격을 받아 전멸하기에 이르렀다. 삼둔자전투에서 참패한 일제는 곧 대대적인 보복전에 나섰다.

 

홍범도는 신중한 전략으로 대처했다. 일본군의 진입을 예상하고, 먼저 주민을 전부 산중으로 대피시켜 마을을 공동화한 다음 독립군에게 작전명령을 내렸다. 다음은 상해판 『독립신문』의 보도 내용이다.

 

“제1연대를 봉오동 상촌 부근에 재한 연병장에 집합하고 작전명령을 하하여 각 부대의 전투력 및 임무를 정찰할새 제1중대장 이전오는 부하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삼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 남단에,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충북단에 점위하고, 각기 엄밀한 전비하였다가 적어 내도할 때에 그 전위를 동구에 통과케 한 후에 적의 본대가 아군이 잠복한 포위 중에 입할 제에 호령에 의하여 사격케 하고 연대 부장교 이원은 본부급 잔여 중대를 영솔하고 서북 산간에 점위하여 병원 증원과 탄약 보충, 식량급식에 임케 하고 특히 제2중대 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로 그 부하 1분대를 인솔하고 고려령 북편 약 1천200미터 되는 고지와 그 동북편 촌락 전단에 약간 병원을 분하여 잠복했다가 적이 내도하거늘 전진을 지체케 하다가 봉오동 방면으로 양패퇴각케 하고 사령관 최진동, 부관 안무는 동북산서간 최고봉 독립수하에 재하여 지휘케 하다.”

 

홍범도가 봉오동전투를 실제적으로 지휘했음이 드러나는 자료다. 이 작전명령으로 독립운동은 일본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의 지휘 아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 그리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대규모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고(대한북로군부) 신민단의 소부대도 참전하여 봉오동 골짜기에서 현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한 대첩이었다.

 

압도적인 일본군의 병력과 화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3.1운동 이후 크게 앙양된 독립군의 사기와 지휘관의 지리적 이점을 적절하게 활용한 전략 때문이었다. 봉오동전투는 4개월 뒤 청산리대첩으로 이어지는 독립군의 사기 진작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청산리대첩을 승전으로 이끌다

어랑촌에 진지 구축, 연합부대 사령관에 추대

일제가 봉오동 참패에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한국 독립군의 위세에 얼마나 공포감을 갖게 되었는지는 각지의 정예부대를 차출하여 대규모적인 특수 군단을 편성한 데서 살피게 된다.

 

한국 독립군은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제가 막강한 병력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 측으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일본군이 훈춘사건을 빌미로 만주를 침략하면서 중국 측의 냉대는 더욱 심해졌다. 이와 관련, 청산리대첩을 깊이 연구해 온 송우혜 작가의 분석이다.

 

“1920년 여름부터 중국 치안 당국은 부쩍 한국 독립군 무장 단체들에 대하여 해산하든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해 왔다. 불응하면 중국군으로 토벌하겠다는 식의 협박 겸 간청이 심했다. 7월부터 9월 초에 걸쳐서 실제로 독립군 단체 근거리들에 육군을 출동시키기도 했다.

 

모두 일본 측의 간도 출병을 사전에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일본이 직접 중국 국경 안에서 활동하는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립군들이 노령에서 신무기를 계속 사들이고, 무관학교를 세워 대원을 조직적으로 훈련시키며, 국경 진입을 계속함에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도록 큰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 독립군 각 단체들은 눈가림으로라도 일본군의 자국 내 출병을 막고자 하는 중국 측의 정책에 응하여 모두 본래의 근거지를 떠나게 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이미 9월 상순에 부하들을 이끌고 장백산록에 들어갔다. 그는 당시 앞으로 1~2개월 내에 일군이 출병하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명월구와 이청배의 독립군기지를 떠나 8월 중 순경에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일대로 옮겨 남완록구와 북완록구를 중심으로 새로운 군사기지를 구축했으며, 그 뒤를 이어 안무의 대한국민회군과 대한의군부,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등 반일 무장 단체들이 차례로 이곳에 도착하여 홍범도 부대와 합세함으로써 강력한 연합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역사적인 청산리대첩은 일본군의 도발로 시작되었다. 1920년 10월 17일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 아즈마 지대는 야마다 연대장에게 20일을 기하여 청산리 일대의 독립군을 포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야마다 연대는 이도구를 거쳐 봉밀구로 우회하여 북로군정서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청산리 계곡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렇게 시작된 청산리대첩은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천수평전투→어랑촌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천보산전투→고동하골짜기전투 등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10차례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전투들은 모두 홍범도의 연합 독립군과 김좌진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 혹은 연합작전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국치 이래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

청산리대첩은 국치 이래 독립군이 이룬 가장 빛나는 항전이었다. 독립군 중에는 신흥무관학교 등 군관학교 출신도 적지 않았지만, 다수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기 하나로 모여든 무명의 청년들이다. 반면에 적군은 일본 정규군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최강의 병력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통칭 ‘청산리전쟁’에서 일본군의 전사자를 약 1천200명이라고 추산하고, 중국신문 『요동일일신문』은 약 2천 명이라고 보도했다.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1925년) 박은식도 일본군 전사자가 약 2천 명이라고 추산했다. 독립군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청산리대첩에서 피아 간의 사상자 숫자에 차이가 큰 것은 아군 측은 숫자를 부풀리는 듯하고, 적군 측은 축소한 까닭이다. 무엇보다 통신시설이 갖춰지지 않았고, 깊은 산골짜기의 전투였기 때문에 정확한 사상자를 알아내기는 불가능했다. 홍범도와 청산리대첩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장세윤의 분석이다.

 

“청산리 독립전쟁의 전과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기록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으나, 지은이의 견해에 의하면 독립군은 일본군 수백 명 또는 최대로 보아 1천여 명 내외를 살상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러시아 측 자료에 김좌진과 홍범도를 대장으로 하는 두 개의 빨치산 연대가 10월 21일~23일 사이에 전투를 벌였는데, 첫날 전투에서만 일본군 220명이 전사했고 홍범도의 제1빨치산 연대는 63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10월 29일에는 안무 중대가 함북 무산 시가지를 점령했다는 기록도 있다. 반면 독립군 측 피해는 350명 정도의 전사 및 부상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홍범도 부대의 전과와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 살상 약 500내지 600여 명, 자신들의 피해는 많아야 100내지 150여 명으로 추계할 수 있다.” 

 

시련 속의 민족혼, 홍범도

일제의 보복 경신참변, 독립군 기반 상실

학살·약탈·소각의 ‘삼광전략’

봉오동청산리 대첩을 주도한 홍범도는 부하들을 이끌고 북상길에 올랐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전을 피하고, 거듭되는 전투에서 피로해진 부하들의 건강 회복을 위한 조처였다. 전력을 더욱 강화하여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려는 것이 원대한 목표였다.

 

홍범도의 부대뿐만 아니라 북로군정서, 국민회군, 군무도독부군 등 연합군 모두가 함께하는 북상이었다. 사령관 회의에서 논의한 결정이었다. 홍범도 부대와 연합군이 간도를 떠난 후 일제의 잔혹한 보복전이 전개되었다. 경신참변, 경신대학살, 간도대학살 등으로 불리는 일본군의 재만조선인 학살은 기록에 따라 3천500여 명에서 5천여 명에 이르는 대참변이었다.

 

청산리대첩에서 참패한 일제는 간도 지역 한인들에 대해 야수적인 보복을 가했다. 한인들이 독립군들의 ‘지원 부대’ 역할을 한 데 대한 분풀이였다. 이참에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 한인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게릴라와 주민이 ‘물고기와 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치 그대로였다.

 

한국 독립군을 쫓아 시베리아 쪽에서 남하하는 일본군과 나남에서 북상하는 일본군은 도로변이나 산골 마을을 가리지 않고 한인 마을을 수색해 청년들은 보는 대로 사살하고, 여성들을 강간하고 가옥에 방화하는 등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한말 국내 의병을 학살할 때에 이른바 ‘삼광전략’, 즉 모조리 죽이고 약탈하고 불지르는 초토화 섬멸작전의 재현이었다.

 

러시아 이동 중 일본군에 타격

홍범도는 11월 하순 왕청현 북부 지역에서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잠시 회동했으나, 이곳 역시 일본군이 주둔하여 오래 머물기 어려웠다. 1920년 12월 초 돈화현 양수천자에 도착하여 이 지역에서 잠시 부대를 재소집하는 일을 서둘렀다.

 

홍범도는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 특파한 안정근 ·왕삼덕 등과 함께 중로연합선전부의 조직에 참여하여 간도지부 집행군무사령관의 직책을 맡았다. 중로연합선전부는 그해 8월경 상하이 임시정부와 러시아 혁명정부 사이에 맺은 공수동맹 조약문의 제5장 규정에 따라 설치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중·러 국경 지방의 한인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만 애초에 임시정부가 의도한 바는 중국과 러시아, 기타 세력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하려는 데 있었던 듯하다.

 

간도지부가 집행하기로 한 내용은 이 시기 홍범도의 사상적 경향의 일단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홍범도 연구가 장세윤은 “집행군무사령관의 직책은 조항에 규정된 ‘부호의 재산 분배’를 실현하는 것이었으나, 홍범도가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중로연합선전의 간도지부 자체가 별 활동을 하지 못했으니 범도 자신도 곧 북만주로 북상하여 시베리아로 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홍범도는 12월 13일 육도부 근처에 일본군 토벌대의 한 지대가 지나간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포위 공격하여 지대장 다카하시 중위 등 18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1921년 1월에는 부하였던 한준성과 김태화가 평안남도 성천군 통천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금융조합 이사 등을 사살했다. 간도에서 학살당한 한인들에 대한 보복 공격이었다.

 

광복을 2년 앞두고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다

스탈린의 폭거로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

평범한 사람도 한세상을 살다 보면 기복과 곡절이 있기 마련이다. 필부라도 시대 상황의 변화와 영향을 받게 된다. 하물며 한 시대의 지도적 인물들에게 기복과 곡절은 필연적이다. ‘하늘을 나는 장군’, ‘빨치산 대장’, 역전의 항일투사 홍범도의 노년은 불우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련 정부의 정책에 의한 고난이었다. 그나마 조국과 가까운 러시아 극동에서 동포들과 조선말을 하면서 살아가던 노후마저도 허용되지 못하고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하게 된 것이다.

 

근대 세계사에서 초유의 ‘민족 강제 집단 이주’는 스탈린에 의해 자행되었다. 극동 지역의 한인이 그 첫 대상이었다. 러시아가 일제와 싸우고, 내전 당시에는 다수의 한인이 적군파에 협력하여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었는데도 스탈린 정권은 한인을 적대시하면서 중앙아시아로 쫓아냈다.

 

75세 일기로 거인은 쓰러지다

1943년 10월 25일 홍범도는 75세의 나이로 크질오르다 산체프나야 거리 제2번지에 있는 자기 집에서 아내와 손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장렬한 생애였다.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동시대의 한국인 중에 그와 같이 초지일관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이도 흔치 않았다. 무장전쟁의 1인자요,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구소련에 의해 이역만리로 이주되어 '머리 깎인 삼손'이 되었지만, 한시도 조국 해방의 염원을 접은 적이 없었다.

 

그가 숨지고 한 달여가 지난 11월 27일 연합국 측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 중국 총통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일제의 패망을 전제로 전후 국제 문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세 영수는 “현재 한국인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 독립 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라는 역사적인 「카이로선언」을 채택했다.

 

이와 같이 조국 독립의 반가운 소식을 듣지 못한 채 홍범도가 파란 많은 삶을 마감한 것은 역시 혁명가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그는 항일전의 맹장, 독립전쟁의 영웅이면서도 군림하지 않았다. 일상이나 전쟁 중에도 병졸들과 똑같이 먹고 자면서 생활했다. 해서 '계급장 없는 장군'으로 불리고, '백두산 호랑이'가 되고, '비장군'의 신화를 낳게 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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