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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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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요약&칼럼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고종 즉위부터 임시정부 수립까지
김태웅, 김대호 지음 | 아르테(arte) | 2019년 2월 | 596쪽 |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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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는 “봉건과 외세라는 이중의 위기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했으며, 무엇을 이루려 했나?”라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한국의 근대가 품고 있던 많은 가능성들을 최대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질문의 전환은 이후에 일어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기념비적인 순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핵심 질문 29개를 던짐으로써 기존 역사적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이 책은 정치사를 위주로 서술하되 사회 경제 변동을 자세히 다루면서 근대의 변화가 당시 한국인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다각도로 보여 주려고 했다. 아울러 일본과 중국을 통해 도입된 서구 문화가 오늘날 한국인의 삶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문화의 유입과 변용 과정을 소개했다. 또한 학계의 통설을 바탕으로 삼되 되도록이면 최근의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했고, 특히 국문학계와 미시사 연구의 성과도 활용하여 근대 한국인의 어문 생활과 대중문화도 담고 있다.

 

■ 저자

김태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문학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한국근대 지방재정 연구』(2013년 두계학술상 수상),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근대』 『국사교육의 편제와 한국근대사 탐구』『이주노동자, 그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왔나』『우리 학생들이 나아가누나』『규장각』(공저)『우리 역사, 어떻게 읽고 생각할까』(공저) 『신식 소학교의 탄생과 학생의 삶』『어윤중과 그의 시대』 등이 있으며 그 외 다수의 논저를 저술했다.

 

김대호

㈜지음교육 대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현재 교육 분야 큐레이션 사업을 통해 가치 있는 교육 정보를 공유하고 교육 문화를 개선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우리 역사, 어떻게 읽고 생각할까』(공저)『야스쿠니 신사의 비밀』『중국 사신 장건, 실크로드를 개척하다』『통일신라의 혜초, 실크로드를 왕오천축국전에 담다』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1장 흥선대원군, 개혁가인가 망국의 원흉인가?

왕의 아버지는 어떻게 적폐를 청산하려 했을까? | 경복궁 중건은 대원군의 오판이었을까? | 대원군은 왜 통상 개방을 거부했을까? | 두 차례의 양요는 조선에 무엇을 남겼을까? |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왜 그렇게 나빠진 것일까?

 

2장 조선은 왜 닫힌 빗장을 열었을까?

일본은 왜 조선 정벌을 주장했을까? | 강화도조약의 원인이 운요호사건뿐이었을까? | 조선은 정말 ‘조약’을 몰랐을까? | 강화도조약, 무엇이 문제였을까? | 조선은 서구 열강 중 왜 미국과 가장 먼저 수교를 맺었을까?

 

3장 김옥균,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개화파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 급진 개화파가 정변을 준비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 갑신정변은 왜 삼일천하로 끝났을까? | 김옥균은 왜 상하이에서 암살당했을까? | 김옥균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4장 조선의 시장 개방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왜놈은 진고개, 장꼴라는 북창동’ 이 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 한성 개방은 어떤 문제를 가져왔을까? | 일본 상인과 청 상인 사이에서 조선 상인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 당대의 최고 히트 상품은 무엇이었을까? | 방곡령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5장 운동인가, 혁명인가, 전쟁인가?

그들은 왜 따로 집회를 열었을까? | 민란은 어떻게 전쟁으로 변할 수 있었을까? | 농민군의 「폐정 개혁안」은 사실일까? |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패배한 까닭은 무엇일까? | 1894년에 일어난 이 사건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6장 청일전쟁,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가?

일본은 어떻게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을까? | 그 전쟁은 과연 조선을 위한 것이었을까? | 조선의 ‘독립’은 어떤 의미였을까? |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에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 청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에 어떤 부작용을 남겼을까?

 

7장 갑오개혁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갑오개혁은 왜 여러 개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 갑오개혁은 과연 자율적이었을까? | 국가 대개혁 구상을 통해 무엇을 바꾸려고 했을까? | 조선 사회는 왜 단발령에 그토록 강력하게 반발했을까? | 갑오개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8장 명성왕후는 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은 무엇일까? | 을미사변 당일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 왜 왕비를 노렸을까? | 그 시절에 왕비는 어떻게 평가되었을까? | 우리는 명성왕후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9장 아관파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을미사변 직후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 아관파천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 아관파천 이후 조선 내부의 권력은 어떻게 변했을까? | 러시아 공사관에서 조선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 러·일이 맺은 세 개의 의정서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10장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를 꿈꾸었는가?

고종은 왜 환궁을 결정하게 되었을까? | 대한제국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 광무개혁은 무엇을 추구했을까? | 서구 문물은 우리의 의식주를 어떻게 바꿔 놓았을까? | 대한제국은 왜 전제군주제를 지향했을까?

 

11장 만민공동회는 왜 ‘원조 촛불’이라고 불릴까?

서재필은 어떻게 독립협회를 세울 수 있었을까? | 『독립신문』이 큰 인기를 얻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 독립협회와 광무정권은 어떤 관계였을까? | 만민공동회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 주었을까? | 광무정권은 왜 만민공동회를 탄압했을까?

 

12장 고종, 현명한 군주인가 어리석은 군주인가?

고종을 평가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는 무엇일까? | 고종은 왜 ‘암군’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을까? | 고종을 ‘현군’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 ‘광무개혁’ 논쟁은 왜 그토록 주목받았을까? | 대한제국 평가에서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

 

13장 독도와 간도, 왜 ‘문제’가 되었을까?

‘간도 문제’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 대한제국은 어떻게 간도의 소유권을 다시 주장할 수 있었을까? | 독도는 왜 우리 땅일까? | 독도는 왜 분쟁의 대상이 되었을까? | 지금 우리에게 간도와 독도는 어떤 의미일까?

 

14장 대한제국은 왜 중립국이 되려고 했는가?

조선에서 ‘중립’은 언제 등장했을까? | 대한제국의 외교정책은 왜 중립화로 귀결되었을까? | 러·일은 대한제국의 중립화를 왜 거부했을까? | 대한제국은 어떻게 국외중립 선언을 할 수 있었을까? | 대한제국의 중립화 실패는 무엇을 남겼을까?

 

15장 러일전쟁이 대한제국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는 왜 패배한 전투를 기념했을까? | 일본은 왜 그토록 뤼순 점령에 집착했을까? | 일본 해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 대한제국은 국제 질서에서 어떻게 고립되었을까? | 러일전쟁이 낳은 결과 이면엔 무엇이 있을까?

 

16장 을사늑약 이후 주권은 어떻게 상실되어 갔는가?

‘시정 개선’이 왜 비극의 시작이었을까? | 을사늑약은 무효일까? | 통감부 시기, 대한제국은 누가 통치했을까? | 고종황제의 양위식에 왜 환관 두 사람만 서 있었을까? | 대한제국의 주권은 어떻게 해체된 것일까?

 

17장 대한제국의 언론은 국망의 위기와 어떻게 싸웠을까?

「시일야방성대곡」은 왜 유명해졌을까? | 혈죽은 어떻게 '신화'가 되었을까? | 『대한매일신보』는 왜 국채보상운동에 주목했을까? | 『대한매일신보』는 왜 국채보상운동으로 위기에 빠졌을까? | 대한제국의 대표 신문은 어떻게 쇠락했나?

 

18장 ‘애국계몽’에 담긴 의미가 왜 서로 달랐을까?

을사늑약 이후에 수많은 정치단체와 학교가 만들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 애국계몽운동은 얼마나 ‘애국적’이었을까? | 신민회는 왜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까? | 신민회는 공식적으로 공화정을 주장했을까? | 105인 사건은 어떻게 신민회의 손발을 묶었을까?

 

19장 의병 전쟁은 어떤 유산을 남겼을까?

의병장 유인석은 왜 큰 공을 세운 부하를 죽였을까? | 최익현이 스스로 의병을 해산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 군대 해산 이후 의병 전쟁은 어떻게 변했을까? | 일제의 의병 탄압을 ‘제노사이드’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 당대의 한국인들은 의병 전쟁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20장 고종은 왜 헤이그 특사라는 승부수를 던졌을까?

고종은 왜 만국평화회의에 주목했을까? | 헤이그 특사는 국제사회의 외면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 우리는 왜 헤이그 특사 3인을 기억해야 할까? | 고종은 강제 퇴위 후에 국권 수호를 위해 어떤 활동을 했을까? | 고종은 왜 러시아 망명을 준비했을까?

 

21장 안중근은 마지막 순간에 왜 ‘동양의 평화’를 강조했을까?

안중근은 왜 하얼빈으로 갔을까? | 왜 1910년대 전후를 ‘암살의 시대 ’라고 할까? |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이토의 동양 평화론과 무엇이 달랐을까? | 안중근은 왜 한·중·일 모두로부터 존경받았을까?

 

22장 경술국치 당일은 왜 조용했을까?

안중근의 의거는 왜 일진회가 주장한 합방의 이유가 되었을까? | 일진회는 어떤 조직일까? | 일진회가 나라를 판 대가로 받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 강제 병합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 한일 병합을 가리키는 용어는 왜 그렇게 많을까?

 

23장 그때 우리는 조선인이었나, 일본인이었나?

왜 헌병이 경찰 업무를 담당했을까? | 조선 사람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 한다고? |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어떤 방식으로 통치하려고 했을까? | ‘조선인’들은 왜 소학교가 아니라 보통학교에 다녀야 했을까? | 일제는 ‘이등 국민’을 어떻게 차별했을까?

 

24장 그것은 과연 개발이었는가, 수탈이었는가?

일제는 왜 ‘조선 엑스포’를 개최했을까? | 식민지 조선은 어떻게 개발되고 있었을까? | 토지조사사업은 왜 논란이 되었을까? | 일제가 한국의 산림에 눈독을 들였던 까닭은 무엇일까? | 일제는 한국의 산업을 어떻게 재편하려고 했을까?

 

25장 1910년대에 왜 소설과 영화가 유행했을까?

『매일신보』는 왜 소설을 신문 1면에 게재했을까? | 소설은 어떻게 ‘대설’을 대체할 수 있었을까? | 전통 공연물은 왜 신파극에 밀리게 되었을까? | 왜 변사가 극장의 스타로 부상했을까? | 1910년대 극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26장 식민지 조선에서 우리는 어떻게 싸웠을까?

일제강점기의 의병은 왜 한국 황실을 포기하지 못했을까? | 대한제국 황실은 어떻게 기울었을까? | 무단통치기 국내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대한광복회는 어떤 단체일까? | 대한광복회의 행동 강령은 왜 비밀·폭동·암살·명령이었을까? | 새로운 독립운동은 어떻게 준비되고 있었을까?

 

27장 그들은 왜 독립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 이회영과 이상룡은 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거론될까? | 북간도는 어떻게 독립 정신의 중심지가 되었을까? |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왜 외면받았을까? | 안창호·이승만·박용만은 왜 다른 길을 갔을까?

 

28장 무엇이 3·1운동을 ‘세계적인 경이’로 만들었는가?

민족자결주의는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 왜 종교인들이 3·1운동을 대표하게 되었을까? | 3·1운동 당일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 이천만 동포의 함성은 어떻게 한반도를 울렸을까? |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어떤 만행을 저질렀을까?

 

29장 대한민국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가?

3·1운동을 왜 ‘혁명’이라고 불렀을까? | 왜 그렇게 많은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을까? | 「대한민국 임시 헌장」이 꿈꾼 국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임시정부 여러 개는 어떻게 하나로 통합되었을까? | 대한민국은 왜 1919년에 건국되었을까?

 

참고 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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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웅, 김대호 지음/아르테(arte)/2019년 2월/596쪽/22,000원


흥선대원군, 개혁가인가 망국의 원흉인가?

흥선대원군은 한국 근대사의 첫 장을 여는 인물이다. 그는 왕의 아버지이면서 왕이 아니었고, 10년간 왕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왕에 의해 물러나야 했던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임술농민항쟁의 원인이 된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 세도정치를 타파하면서 대내 정치에서 개혁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통상 개방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과 전쟁까지 불사하며 대외 관계에서는 보수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봉건’과 ‘외세’라는 두 변수 앞에서 그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 선택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왜 그렇게 나빠진 것일까?

흥선대원군은 삼정의 문란과 양반 지배층의 폐단을 바로잡았고,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름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많은 백성들이 대원군에게 등을 돌렸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건 대원군이 추구했던 국왕 중심의 부국강병 정책이 가진 한계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화재 때문에 중단될 위기에 빠진 경복궁 중건을 백성들로부터 물자와 노동력을 수탈하면서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1868년 경복궁 중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때 이 사업을 주도한 흥선대원군의 권위는 한껏 높아졌지만, 왕의 권위를 높이느라 황폐해진 민심은 경복궁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과다한 재정 지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 미국 등의 외세에 맞서 싸우기 위해 각 지방의 군비를 확장하는 과장에서 백성들의 부담이 더욱 커졌습니다. 국가의 재정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궁궐을 새로 짓거나 군사비를 확장하는 등 소모적인 분야에 집중된 셈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집권 10년이 여러 층위의 수탈로 뒷받침되면서, 그의 정책이 추구했던 긍정적인 면도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높인 것은 며느리였던 명성왕후와의 권력투쟁이었습니다. 대원군은 집권 10년 만에 성인이 되어버린 아들에게 최고 권력을 넘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왕이었던 그는 최고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절대 반지’를 빼앗긴 대원군의 분노는 실제로는 고종을 겨냥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왕비를 향했습니다. 대원군이 물러난 후 왕비의 외척 세력이 대거 등용되어서 대원군 세력을 대신해 핵심 부서에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민씨 가문이 각종 부정부패에 연루되자, 백성들은 오히려 대원군이 통치하던 시기를 그리워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대원군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1874년에 왕비의 양오빠였던 민승호의 집에 폭탄이 터져 민승호와 그의 가족이 함께 사망했고, 1876년에는 고종과 왕비의 숙소인 교태전에서 화약이 폭발해서 궁궐 전체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사건들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사람은 어김없이 대원군이었습니다. 또한 정부 내부에서 발생한 굵직한 권력투쟁에 대원군이 항상 있었습니다. 1882년에 구식 군인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이 혼란을 이용해 대원군은 33일의 짧은 시간 동안 권력을 잡았고, 이 임오군란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에 압송되어 4년 동안 청나라에 유폐되기도 했습니다. 청에서 풀려난 후에도 그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동학농민군과 접촉하며 권력을 되찾고자 했고,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의 현장에도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대원군의 권력욕은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한 채 표출되었으며, 그 결과는 일본이 꾸미고 있었던 조선 침략에 이용되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대원군의 이미지는 더욱 왜곡됩니다. 그 중요한 단면은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와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작성한 해는 대원군이 집권하기 2년 전인 1861년 철종 때였는데, 1934년 일제가 보통학교 학생들을 위해서 발간한 『조선어독본』에서는 이 사실이 다음과 같이 왜곡된 채 서술됩니다. “대원군은 다 아는 바와 같이 배외심(排外心)이 강한 어른이시라, 이것을 보시고 크게 노하시어 ‘함부로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나라의 비밀이 다른 나라에 누설되면 큰일이 아니냐.’고 하시고, 그 지도판을 압수하시는 동시에, 곧 정호 부녀를 잡아 옥에 가두셨더니, 부녀는 그 후 얼마 아니 가서, 옥중의 고생을 견디지 못하였는지 통탄을 품은 채 전후하야 사라지고 말았다.”

 

일제는 대동여지도와 같은 우수한 지도를 만든 인재를 몰라보는 조선 정부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려고 했고, 그 중심에 대원군의 ‘배외심(외국을 배척하는 마음)’을 두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가짜 뉴스였고, 명백한 왜곡이었습니다. 

 

고종, 현명한 군주인가 어리석은 군주인가?

우리에게 고종과 대한제국의 이미지는 어떻게 남아 있을까? 많은 한국인들이 고종에 대해서는 무능함을,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무기력함을 떠올린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일 것이다. ‘고종과 대한제국이 능력이 있었다면 일제가 국권을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라는 의문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 번도 외세에 의해 나라가 망한 적이 없었던 우리 역사였기에 나름의 설득력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상황을 보면 국권을 상실하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특별한 경우였다. 아시아의 수많은 국가 중에서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은 나라는 단 세 나라, 제국으로 부상한 일본, 반 식민지 상태였던 중국,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중립지대로 독립을 유지했던 시암(태국) 뿐이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무지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국권을 상실한 것일까? 침략자의 야만적인 폭력은 사라지고 피해자의 무능함만 강조되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고종과 대한제국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고종을 평가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는 무엇일까?

1980년대만 해도 고종은 한국 근대사의 연구 대상조차 되기 어려웠습니다. 독재 정권에 맞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높았고 역사학계도 이에 부응하고자 동학농민운동 등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연구 역량을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로부터 불과 100년 전후의 가까운 시기를 연구하면서, 연구자가 은연중에 연구 대상과 자신의 지향점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종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만으로도 ‘복벽론자’나 왕조 사관을 가진 사람으로 오해받기 쉬웠던 점도 고종 연구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고종 연구를 가로막았던 또 하나의 장벽은 대한제국의 멸망이 고종 때문이라는 ‘망국책임론’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정을 채택한 나라였고 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가졌기 때문에, 고종이 망국에 대해서도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결과를 보고 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원인만 끌어모으는 결과론적 해석 방식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과론적 해석에 매우 익숙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시험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받았을 때나 우리가 응원하는 스포츠 팀이 경기에서 패배했을 때 우리가 원했던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 그 모든 상황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결과론에 집착할 때 핵심은 결과일 뿐, 그 과정에서 얻은 부분은 그저 구구절절할 변명으로 접어놓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우리의 일상 곳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성공과 패배가 결정되는 모든 상황에서 결과론적 해석은 조건반사와 같이 우리 뇌를 지배합니다.

 

고종과 대한제국을 평가하는 상황에서도 결과론적 해석이 늘 문제가 됩니다. 대한제국이 실패한 원인을 찾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지면서, ‘그때는 왜 실패했을까?’. 이 사건에서는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 등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후견지명‘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결정되고 난 후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오래된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질문을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라는 과정 중심의 사고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해서도 성급하게 평가를 내리는 것보다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의 선택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선의 국왕은 왕조의 상징이자 모든 정치권력의 근거가 되었고, 이로 인해 국왕을 둘러싸고 오늘날만큼이나 복잡한 정치적 갈등이 전개되었습니다. 고종이 즉위했던 기간은 이러한 대내적 갈등 위에 외세의 직접적인 갈등까지 더해지면서,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복잡한 세력 갈등과 역할 관계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복잡한 변수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당대의 관점과 노력을 되짚어 보는 것이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더 유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종에 대한 평가는 국왕 개인의 품성이나 역량을 평가한다거나 그를 옹호 내지 책임을 묻겠다는 식의 도덕주의적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대한제국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더불어 진행되어야 합니다. 우리 역사학계가 이 과정을 밟아 오면서 고종의 여러 개혁 정책을 긍정적으로 인정한 것은 그저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높이겠다는 소위 ’국뽕 사학‘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한제국 시기에 구체제의 핵심이었던 국왕이 어떻게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특수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의 언론은 국망의 위기와 어떻게 싸웠을까?

을사늑약 이후,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의 여론을 주도하던 가장 중요한 언론 매체였다. 두 신문사는 각각 특별한 사연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황성신문』은 주필이었던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해서 을사늑약에 대한 분노와 함께 그 명성을 키워 갈 수 있었고,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초부터 1여년간 전국을 뜨겁게 만들었던 국채보상운동과 더불어 그 영향력을 더욱 확장해 갔다. 국망의 위기 속에서 두 언론사는 왜 이 사건들에 주목했을까? 그리고 역사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 사건들은 두 언론사에 과연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시일야방성대곡」은 왜 유명해졌을까?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후, 일제는 민심의 동요를 우려해서 한동안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황성신문』은 11월 20일 자 기사로 ‘보호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제의 강압을 상세하게 폭로하는 한편, 주필이었던 장지연의 비분강개하는 논설을 게재했습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오늘이야말로 목 놓아 크게 울 날이로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바로 그 글입니다.

 

우리 대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해 마지않으셨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할 것은 이토 히로부미 스스로가 알아 파기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ㅇ니란 자들이 사사로운 영화를 바라 머뭇거리고 으름장에 겁먹어 떨면서 매국의 역적 됨을 달갑게 여겨서 사천 년 강토와 오백년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 바치고 이천만 동포를 몰아 남의 노예로 만드니 ......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남의 노예가 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단군 기자 이래 사천 년을 이어 온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위의 내용은 을사늑약 체결을 허락했던 대한제국 정부의 대신들을 향해 ‘개돼지만도 못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매국 행위를 비판한 「시일야방성대곡」의 주요 부분입니다. 이 글이 발표된 이후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은 한반도에서 최악의 욕으로 널리 쓰이게 됩니다.

 

그런데 장지연이 이 글을 쓴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장지연은 원래 이토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한일의정서 이행을 강요하기 위해 이토가 한국을 찾았을 때 『황성신문』은 ‘동양 평양론의 전도사’인 이토를 열렬히 환영하며 동양 평화의 실현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이토가 고종과 정부 대신을 협박하여 한국을 침략하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장지연은 목 놓아 통곡할 만큼 배신감을 느꼈고, 그제야 동양 평화론이 단지 일제의 침략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뒤늦은 반성문이 되었지만 「시일야방성대곡」은 “거의 집집마다 보관하고 외웠다”고 할 정도로 민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제는 장지연을 구속하고 『황성신문』에 무기 정간 조치를 내렸습니다. 이 조치를 보며 『제국신문』은 ‘한때 분함을 참으며 백 년 화근을 면함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써서 을사늑약의 책임이 한국인에게 있다며 일제의 탄압에 꼬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검열로부터 자유로웠던 『대한매일신보』는 『제국신문』과 달리 “오호라! 황성 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라며 장지연과 『황성신문』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대한제국의 대표 신문은 어떻게 쇠락했나?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영국인 기자 베델을 발행인, 양기탁을 발행 책임자로 삼아 창간되었습니다. 이 신문은 처음부터 일제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고, 의병 투쟁에도 호의적이어서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신문이 있었으나, 제일 환영을 받기는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였다. 당시 정부의 잘못과 시국 변동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관 쓴 노인도 사랑방에 앉아서 신문을 보면서 혀를 툭툭 차고 각 학교 학생들은 주먹을 치며 통론했다(유광렬,『별건곤』. 1929년 1월).”는 평가는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당시 한국 독자들의 반응을 잘 보여 줍니다.

 

1907년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전개되고 『대한매일신보』가 그 중심에서 활약하면서 『대한매일신보』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이 정점에 있던 1907년 9월 무렵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한글·영문 세 종류의 발행 부수를 합쳐서 1만 부 이상을 발행했습니다. 이 수치는 당시 한국에서 발행되던 여타 신문 부수를 합친 것의 두 배가 넘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를 견제하기 위해서 영국과의 외교 교섭을 통해 베델을 추방을 요구하는 한편, 「신문지법」의 일부를 개정하여 ‘외국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과 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도 발매·반포를 금지하고 압수할 수 있다는 조항을 포함시켰습니다. 『대한매일신보』의 판매와 배포를 금지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한 후, 통감부는 이 법률을 내세워 신문을 압수하거나 구독을 방해하는 등의 탄압을 가했습니다. 또한 통감부의 기관지였던 『서울 프레스』를 동원하여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논설을 비난하는 등의 방해 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대한매일신보』는 신문사 정문에 ‘일본인 출입 금지’라는 문구를 붙이고 일본의 침약 행위를 규탄하면서, 반일 논지를 전혀 굽히지 않은 채 통감부의 언론 탄압에 맞섰습니다. 또한 신채호와 박은식 등 『대한매일신보』 주필들은 논설을 통해 이완용 및 일진회의 매국 행위를 매섭게 비판하고, 실력 양성을 강조하는 문명개화론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국가 독립을 지켜 나갈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상하이에서 돌아온 베델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대한매일신보』의 앞날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가 “『대한매일신보』의 통감부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은 베델을 암살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쓴 적이 있었는데, 이 기사가 예언처럼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베델은 2차 재판을 받기 전인 1908년 5월에 비서였던 알프레드 만함에게 『대한매일신보』의 발행 및 편집인 역할을 물려주었지만, 만함은 베델이 죽은 후 그만큼 강단 있게 반일 논조를 펼치지 못했습니다. 만함의 건강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채권자의 독촉마저 심해지면서,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6월 14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근무하던 사원 이장훈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실제 매수자는 통감부였습니다. 통감부는 강제 병합이 성사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의 매수를 비밀에 부쳐 두었다가 강점과 함께 신문을 넘겨받아 ‘대한’ 자를 떼어내고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꾼 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삼았습니다. 일제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대한’의 신문이 그 이름도, 목소리도 잃어버린 채 조선총독부의 앵무새가 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무엇이 3·1운동을 ‘세계적인 경이’로 만들었는가?

『데일리 메일』의 특파원으로 한말의 유명한 의병 사진을 찍었던 매켄지는 『대한제국의 비극』을 통해 한일 강제 병합 이전의 상황을 폭로했지만, 훗날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이라는 책으로 서구에 3.1운동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1919년 봄에 일어난 한국 국민의 평화적인 항일 봉기는 세계적인 경이였다. 지금까지 세계 정치인에 의해 무기력하고 비겁하다는 별명과 딱지가 붙여져 왔던 한 나라의 국민이 이제 아주 높은 수준의 영웅심을 발휘했던 것이다. ...... 그들이 감옥에 끌려가면 다른 이들이 대신 그들 자리에 들어섰고 이들이 끌려가면 또 다른 이들이 그들의 일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천만 동포의 함성은 어떻게 한반도를 울렸을까?

3월 1일 이후, 고종황제의 인산일이었던 3월 3일까지 서울에서는 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숨을 돌린 만세 시위는 3월 5일부터 재개되었고, 총독부는 계속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기병 2개 대대와 야포 중대를 투입해서 경비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일본군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서울은 겉으로 조용했지만, 물밑으로 각종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언제라도 만세 시위가 재개될 듯한 긴장감이 이어졌습니다. 총독부가 3월 26일부터 서울에 계엄령을 발동하면서 경계 태세를 강화하자, 그 후 서울 시내에서의 만세 시위는 잦아들었습니다.

 

지방에서도 3월 1일부터 만세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서울과 연결된 철도와 간선도로를 따라 서울에서 활동하던 학생과 지식인들이 각 지방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지하신문을 발행하며 동맹휴학을 이끌었습니다. 운동 초기에는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농민·노동자·상공업자 등이 이 대열에 가세했고 모든 계층이 자발적으로 이 역사의 현장에 하나씩 등장하며 존재감을 드러내었습니다.

 

각 지방에서의 만세 시위는 주로 장날에 인파가 몰려드는 장터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3월 말부터 4월 초에 정점에 이르렀다가 8월까지도 크고 작은 시위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일본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 232개 부·군 가운데 95퍼센트에 이르는 218개 부·군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으며, 1919년에만 약 200만 명이 참여했습니다.

 

3.1운동의 출발은 파리강화회의나 고종의 국장 등 특정한 계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이 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장기간 지속되고 전 계층이 동참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일제와 맞서 싸웠던 1910년대 국내외의 모든 조직이 간직한 내적 역량 때문이었습니다. 초기에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종교인과 학생들의 영향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농민과 노동자들이 시위를 주도해 갔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어부·장꾼·지게꾼·인력거꾼·기생·거지 등 전 계층이 모두 참여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평화적으로 전개되던 초기의 만세 시위는 일제의 잔혹한 무력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 갔습니다.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총 207개 부·군에서 발생한 시위 형태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약 30퍼센트가 폭력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각 지방의 만세 시위에서 후기보다 초기에 폭력 시위가 더 많았던 점이 주목됩니다. 이것은 당시의 폭력 시위가 일제의 무력 진압에 대응해서 나타난 것뿐 아니라, 한국의 민중들이 일제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서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실천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던 농민들이 폭력 시위에 가장 앞장섰습니다. 토지조사사업과 더불어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농민들은 조직적으로 일제에 대응하는 한편, 이웃 지역과의 연대를 통해 지역적 고립성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독립 문제 외에도 각종 생활상의 이해관계를 전면에 내걸고 봉기했는데, 과거의 투쟁 방식을 살려 봉화나 횃불 시위에서부터 벽서 부착·전단 살포·폭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투쟁을 선보였습니다. 폭동의 경우는 초보적인 무기로 무장해서 일제의 행정관청·우편소·소학교·공립보통학교·금융조합·일본인 집 등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19년 3월에서 5월까지 일제 군경에 체포되어 기소된 시위자 가운데 약 60퍼센트가 농민이었던 것을 보면, 농민 계층의 시위 참여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농민들의 폭력 푸쟁은 민족 대표가 강조했던 비폭력 투쟁과 대조됩니다. 그러나 민족 대표 33인의 ‘비폭력’ 투쟁과 농민들의 ‘폭력’ 투쟁 가운데 무엇이 일제를 더 위협하고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대변했는지는, 민족 대표들의 형량이 길어야 3년이었던 것에 반해 폭력 시위를 주도했던 농민 지도자의 형량은 15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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