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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모르겠고 하루만 열심히 살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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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모르겠고 하루만 열심히 살아봅니다

충실히 산 하루가 모이면 내 인생이 됩니다
최현송 지음 | 팜파스 | 2020년 6월 | 236쪽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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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질문하고 대답하고 행동하다보면,

달라진 하루가 다른 삶을 만들어 줄 것이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코로나 시대를 사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오늘을 열심히 사는 일이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삶과 즐거움, 가치에 충실하기를 말하고, 바라고, 다짐해 왔지만 그 다짐은 하루도 못가기 마련이다. 어제의 다짐이 오늘 아침에, 오늘 아침의 다짐이 오후에 흩어졌다가 결국 ‘하루 정도야 어때’ 하고 마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그냥 그렇게 보낸 하루가 모여 ‘오늘 하루도 날렸어’ ‘나는 왜 이럴까’ ‘미래가 불안해’ 하다 결국 불안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래서일지 모른다. 탕진잼, SNS에 올릴 사진을 위한 여행 등 순간에만 집착하는 것은.

 

이 책은 잃어버린 하루를 찾도록 돕는다. 각자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른 하루를 보내기 마련이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만의 하루를 온전히 살 수 있도록 돕는 방법들이 있다. 우선 그간 잊었고 있던 하루의 가치와 의미를 살펴보고, 하루를 살아내는 데는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 이야기들 들려준다.

 

■ 저자 최현송

우리가 사랑하고 슬퍼하는 모든 순간이 하루에 담겨 있다고 믿는 사람.

 

방송 구성작가, 강연자, 책 관련 스타트업 등을 거치며 빠르게 사는 동안 하루를 잊고 지냈다. 최우선 에너지를 밥벌이에 밀어 넣는 고달픈 프리랜서지만 언젠가 하루를 낯설게 발견하며 어슬렁거리는 게으른 여행자처럼 살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 차례

Part 1. 하루를 산다는 것

인생 말고 하루

떨어질 수 없는 어제와 내일,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이어진다

소확행 다음에 오는 것

아침에 하고 싶은 일 한 가지

그녀가 바란 하루

시시포스의 소소한 즐거움

서퍼의 파도 vs 항해사의 파도

 

Part 2. 오늘은 오늘의 행복만

아름다움을 보기로 했다

하루라는 예술, 브이로그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글쓰기

더 좋은 하루를 찾아, 여행

여행자의 시간으로 살기

활력을 찾아, 동네 목욕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산책

장르 소설 읽는 시간

오늘도 오믈렛을 만듭니다

뒷산의 힘

성실한 비관론자의 숲

 

Part 3. 단순하게 삽니다

하루라는 자기 계발

나를 좋아하고 싶어서

자존감과 멘탈보다 중요한 것

당신의 기분은 틀리지 않습니다

정규직이 될 수 있다면

그 누구보다 나를, 잘 데리고 살기

회사를 그만두어도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그녀들에 대하여

친구가 없어도 괜찮을까?

인간관계에 정답은 없다지만

 

Part 4. 하루의 기술

싫음의 취향, 좋음의 취향

실패한 취미 목록을 공유합니다

아직 배울 것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서 몸으로, 중심을 옮겨봅니다

좋아하는 펜으로 씁니다

일요일 밤의 다이어리

음식과 사이좋게 지냅니다

공복으로 나를 들여다봅니다

목표 앞에서 조금은 뻔뻔해집니다

조촐하게 차립니다

티타임, 잠깐 시간을 잊습니다

빈 방의 빛을 봅니다

 

에필로그. 그저 해보는 삶

책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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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송 지음/팜파스/2020년 6월/236쪽/14,000원


하루를 산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이 이어진다

비혼의 프리랜서에, 물려받은 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에겐 암묵적으로 금지된 질문이 있다. 아마 누가 생각해도 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용케도 내게 이 금기의 질문을 꺼낸 사람이 있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데 노후가 걱정되지 않으세요?”

 

적당한 친밀감 아래 염려와 궁금증이 섞인 깨끗한 눈빛의 질문이었기에 내게서도 솔직하고 담백한 답이 툭 튀어나왔다.

 

“글쎄요. 사고 칠 남편도 자식도 없는데 저 한 몸이야 어떻게 못 살겠어요?”

 

질문한 이는 가난을 겪은 후 일찍이 큰돈을 벌어 조기 은퇴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빈곤의 쓴맛을 아직 덜 본 것 같다는 걱정을 내게서 끝내 거두지 못한 표정으로 웃었고 나는 이날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그 노골적은 질문으로 나의 현실적인 위치를 확인해서가 아니라 불안을 대하는 내 태도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그래서 키가 덜 컸나 싶을 정도로 불안이 많은 어린이었다. 엄마랑 영화를 보러 가면 영화관 입장 후에도 엄마가 무심히 버린 티켓을 주워 만약을 대비했고 만원 버스에서 어렵게 확보한 자리에 엄마가 날 앉히면 혹여 엄마의 정수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목을 빼고 찾았다. 혹시 엄마가 깜빡하고 나를 잊고 내릴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아무리 다리가 아파도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고 서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밤엔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면 어쩌지’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기도 했다.

 

자라면서 불안은 다양한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회피와 외면, 때로는 의존의 형태로 양상만 바뀐 채 끊임없이 출몰했다. 최악은 ‘터무니없이 대범한 척하기’였는데 그건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었고 크고 작은 위험을 불러오기도 했다. 나는 불안이든 회피든 의존이든 기만이든, 성숙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선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판단하고 불안을 몰아내기 위해 싸웠다. 책도 많이 찾아 읽었고 불안의 마음이 올라오면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다는 합리적 근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공부한 불안은 결국 두려움의 다양한 표정 중 하나였고 두려움은 온갖 부정적 감정의 뿌리였다. 쉬운 싸움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앞날에 대한 불안과 더불어 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계속해온 끝에 요즘 내가 믿은 주문이랄까 한 가지 확실한 진실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지금이 이어져 미래가 될 거라는 것. 미래는 지금 이 순간의 연장선 중 어딘가일 뿐이다. 그저 수많은 지금 중 앞으로의 어느 지점일 뿐. 지금을 통과하지 않고 찾아오는 미래는 없다. 나는 이제 불안이 몰려오면 무엇이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이어진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지금 괜찮다면, 괜찮은 날이 이어져 어떤 날이 될 것이다. 

 

아침에 하고 싶은 일 한 가지

다음은 인터넷에서 발견한 한 존경스러운 직장인의 모닝 루틴이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감사 일기를 쓰고 영어 문장을 외운다. 똑바로 앉아 10분쯤 명상한다. 이어 책 세 페이지를 읽은 다음 요가 매트에 눕는다. 요가가 끝나면 샤워를 하고 유기농 채소와 복합 탄수화물, 양질의 단백질로 구성된 아침 식사를 즐긴다.

 

내 지인 중엔 회식 다음 날에도 새벽 다섯 시 반이면 일어나 수영장으로 향한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나는 저렇게 못 한다. 우선 아침형 인간이 못 된다. 어쩌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날엔 오후 서너 시부터 골골댄다. 아침형은 고사하고 아침 여덟시형 인간도 될까 말까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모닝 루틴이 있다. 눈 뜬 직후 침실 창을 열고 이부자리를 가지런히 정돈한 후 거실 소파로 나가 다시 눕기를 매일 반복한다. 소파에 누워 반쪽짜리 사과를 깨물어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밤새 못 본 뉴스와 SNS를 살핀다. 곧 배가 고파진다. 파스타, 볶음밥, 토스트와 오믈렛...간밤의 긴 공복 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아, 쌀쌀한 계절엔 차를 한 잔 마시면서 한다. 나는 이 시간이 그렇게 좋다.

 

모닝 루틴, 나이트 루틴, 주말 루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야 하는 운동선수들 사이에서나 쓰이던 단어 ‘루틴’이 요즘 이곳저곳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어찌나 자기 관리, 시간 관리에 철저한 사람들이 많은지 듣고 있자면 나만 너무 되는대로 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성공을 위한 열 가지 습관’과 같은 자기 계발서의 지침들과 무엇이 다를까 싶었던 루틴에 대해 최근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 바로 글쓰기 루틴을 통해서다.

 

단행본 마감을 앞두고 요즘 매일 네다섯 시간 규칙적으로 글을 쓰다 보니 내게도 글쓰기 루틴이 생겼다. 커피나 차를 한 잔 만들어 곁에 둔 다음 오늘 쓸 아이템에 어울리는 음악을 떠올린다. 노트북 충전기를 연결하고 부팅한 다음 유튜브에서 최소 두 시간이 넘는 음악을 플레이한다. 주로 피아노 연주곡을 듣는데 건반 음이 강약을 반복하며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아름다운 곡을 만들어내는 일이 어쩐지 글쓰기와 닮아 격려가 된다. 그리고 문서를 열어 깜빡이는 커서를 몇 초간 그냥 본다. 노트북 하단의 시간도 확인한다. 목표 집중 시간은 두 시간. 두 시간 동안은 어떻게든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검열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쓴다. 이 초고는 긴 퇴고 과정을 거치는 동안 원래 모습을 거의 잃을 테지만 어쨌든 이 최초의 주절거림 없이는 글이 완성될 수 없다.

 

내가 겪은 루틴은, 시간 관리나 유익한 습관 형성을 위한 방법이라기보다 불확실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적절한 상태로 세팅하는 일이었다. 나의 루틴은 내게 주는 암시이자 사인이다. 오늘도 나는 고치고 또 고칠, 그렇다고 좋아진다고 보장할 수 없는 부끄러운 초고밖에 못 쓰겠지만 그래도 쓰는 수밖에 없으니 밀고 나가라는 격려, 만족할 만한 글을 쓰기 못해도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다독임이다. 

 

오늘은 오늘의 행복만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산책

하루의 자잘한 기쁨 가운데 단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난 무엇을 고를까. 답변하기 불가능한 질문이지만 어차피 가정이니 골라보자면 바로 산책이다. 걷는 것만큼 확실하게 기쁨을 주는 일도 드문 것 같다. 나는 뛰는 것엔 약하지만 걷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다.

 

그래서 우울할 때, 무언가 풀리지 않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도 나가서 걷기다. 단순한 햇빛의 효력인지 아니면 걷기에 어떤 성스러운 힘이 숨어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걷기는 명랑한 하루를 살기 위한 가장 쉽고 확실한 처방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대로 하기는 어려운 것이 산책 아닐까. 사람들은 의외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용한 일을 하면서도 마음껏 기뻐하기를 어려워한다. 한정된 자원과 시간 안에서 빠듯하게 살다보니 일주일에 고작 한두 번 쉬는 날에도 생산성 있는 활동을 하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 같고 이래선 안 된다는 죄책감마저 든다. 하다못해 식물에 물이라도 주거나 책상 정리라도 해야 마음이 놓인다. 산책보다는 다이어트에 도움 되는 빨리 걷기가 유용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걷는 것은 산책이 아니다. 산책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술이 필요하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산책의 핵심 요소는 목적 없는 느긋한 마음이다.

 

산책은 그냥 걷는 것이다. ‘어디까지 걷고 돌아오자’라는 목표 정도는 있을 수 있지만 이것마저 없는 편이 좋다. 그저 터벅터벅, ‘뭐가 좀 있나?’ 싶은 감각으로 걷다가 문득 좋은 것을 보거나 영감을 떠올리기도 하고 혹은 ‘무아의 상태’에 빠져 잡념을 몰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적 효과일 뿐이다. 효용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야 이런 산택이 가능해진다.

 

산책이 좋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사색을 동반한 혼자의 산책만큼이나 함께하는 산책도 좋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모든 활동을 여럿이하기 보단 혼자서 하는 편이다. 쇼핑도 영화 관람도 여행도 둘 셋보단 혼자가 좋다. 특히 정말 좋아하는 영화나 가고 싶었던 여행지는 되도록 혼자 느끼고자 한다. 내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어서다. 이런 나도 산책만큼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걸 즐긴다. 만나서 산책만 하는 친구도 있었다. 좋은 계절에 걷기 좋은 길을 두세 시간 걷고 근처 맛집을 찾아 밥만 먹고 해 지기 전에 헤어지는 사이. 누군가와 함께하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산책 친구로부터 배웠다. 혼자 사는 산책이 잡념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면 둘이 하는 산책은 정말 쓸데없는 얘기를 마음껏 떠들 수 있어서 좋다. 예쁜 풍경을 지나치면서 무겁고 진지한 얘기를 하는 건 경험상 정말 어렵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 혹은 훌륭한 시민이 되기 위해 진지하게 대화해야 할 자리가 있다면 자잘한 수다를 실컷 떠드는 게 나은 자리도 있다.

 

산책 친구를 잃은 뒤 동네를 넘어선 긴 산책이 뜸해진 걸 보면 확실히 산책은 혼자만큼이나 둘이 하기 좋은 일인 것 같다. 혼자가 편하다고 믿던 나는 산책을 통해 적당한 거리의 동반자가 있는 삶도 꽤 괜찮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다.

 

사람들이 그래서 대체 어디를 걷느냐고 물으면 나만 알고 싶은 길을 몇 군데 얘기하기도 하지만 사실 걷는 곳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산책의 맛을 처음 느낀 건 자주 다니던 집근처 번화가에서였기 때문이다. 술자리 대신 모처럼 몸 돌보기를 택한 늦은 저녁, 술집과 노래방이 몰려있는 거리의 헬스장에서 운동을 끝내고 걸어 돌아오던 길이었다. 달이 환했고 라일락이나 아카시아였을 꽃향기가 진했다. 자주 지나치던, 일상의 지겨움이 담긴 거리가 그날따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투닥거리며 걷는 학생들과 치킨집 앞에 놓인 오토바이조차 그 밤의 완벽한 풍경의 일부로 보였으니, 단지 운동으로 개운해진 몸과 신비롭도록 진동하던 꽃향기 덕분이었을까? 그날의 밤 산책을 시작으로 나는 종종 나가서 걸었고 익숙한 풍경이 매일 조금씩 새롭게 다가온다는 걸 배웠다.

 

티타임이 하루에 작은 여백을 만들어 주는 일이라면 산책은 익숙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잠시 낯설음을 만들어보는 일이다. 일상과의 연결과 분리가 모두 가능한 것, 그리하여 잠시 끊어진 하루를 새롭게 이어갈 기회를 주는 짧은 여행이 바로 산책이다.

 

오늘도 오믈렛을 만듭니다

흔하고 쉬워 보이지만 공을 들여야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있다. 하긴 어떤 요리인들 안 그렇겠냐만 내겐 특히 오믈렛이 그렇다. 오믈렛은 주재료 달걀에 채소나 햄 같은 부재료의 단순한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달걀말이나 달걀범벅과 재료 면에선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요리다. 효율성 측면에서만 본다면 계란을 푼 다음 넣고 싶은 재료를 잘게 썰어 섞은 후 기름 두른 팬에 그냥 뒤적뒤적 부쳐 먹는 것이 가장 좋다. 쉽고 빠르니까. 별다른 수고가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달걀에 무언가를 첨가해 먹고 싶을 때 종종 오믈렛을 만든다. 오믈렛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부재료 없이 순수하게 달걀로만 만들기도 하고 호텔 조식 뷔페처럼 부재료와 달걀은 한데 섞어서 반달 모양을 만들어내는 방법도 있다. 나는 달걀이 부재료를 감싼 형태의 다소 고난도에 속하는 오믈렛을 선호한다. 이 오믈렛을 만들려면 우선 달걀과 부재료 양이 균형을 잘 이뤄야한다. 부재료가 너무 많으면 터지고 적으면 볼품없어진다. 또 부재료를 따로 익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내용물을 미리 반쯤 넣어서 익혀서 넣지 않으면 달걀 이불만 익고 속은 흐물흐물 덜 익은 오믈렛이 된다. 이제 가장 고난도 과정이 남았다. 오동통한 모양을 잡는 일이다. 훌륭한 모양을 위해선 팬과 불을 예민하게 다루어야 한다. 몽글몽글 반쯤 익은 상태의 넓은 달걀 카펫 반원에 속을 살포시 올린 후 반대쪽 반원을 덮어준다. 이때부터 약불로 줄인 뒤 팬을 70도 각도로 세우고 제일 두툼한 부분만 익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손목이 꺾이고 한쪽 어깨가 올라간다. 팬을 평평하게 두고 익히면 절대 오동통한 모양이 잡히지 않고 두툼한 속이 골고루 익지도 못한다.

 

몰입이 필요하다. 타거나 흐물거리지 않도록, 오직 촉촉한 속과 통통한 볼륨감만을 염원해야 한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 순간만큼은 오직 손목의 스냅과 팬의 가자자리와 불의 세기만 중요하다. 그렇게 완성된 오믈렛을 한 입 베어 물면 입안으로 그 포슬포슬한 달걀 이불과 촉촉한 속이 조화롭게 밀려든다. 그저 ‘맛있는 오믈렛을 먹었다’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양 오믈렛 만들기에 집중하는 동안 별것 없는 나의 일상에 잠시 호화로움이 깃든다. 

 

단순하게 삽니다

하루라는 자기 계발

프리랜서에게 주어진 하루란 유리구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보기 좋지만 깨지기도 쉬워 다루기 만만치 않은. 많은 직장인들이 프리랜서에게서 자유를 먼저 떠올리지만 이 자유는 위태로움의 다른 면일 뿐이다. 자칫하면 원칙 없이 흐트러지기 쉽다. 아름다운 구속이든 지긋지긋한 굴레든 나를 강제하는 것이 없으니 그야말로 하기 나름, 살기 나름이다. 어쨌거나 남들 보기에 속 편한 한량인 나는 요즘 내 하루가 퍽 마음에 든다.

 

오전 스케줄이 없으면 아홉 시쯤 일어나 차를 골라 마신다. 아침에 차 마시며 멍 때리는 시간이 좋아 프리랜서로 사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시간을 사랑한다. 열 시가 지나면 간단한 브런치를 만들어 먹는데 국물이 당기는 날엔 떡국, 간혹 고기와 채소구이, 빵집에 다녀온 다음 날이라면 거친 빵에 달걀과 치즈를 올려 한 끼를 차리기도 한다. 가장 자주 해 먹는 건 파스타인데 내겐 이만큼 소중한 메뉴도 없다. 우선, 만들기 쉽고 어떤 재료든 대부분 사용 가능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이 가능해 질리지도 않는다.

 

만들고 먹고 치우는 데 30분이면 족한 브런치를 끝내면 망설이는 마음이 자라기 전에 자외선 차단제부터 바르고 곧장 숲으로 간다. 얕지만 꽤 넓은 숲이라 요리조리 헤매다 하루 한 번 걷기 좋은 40분 코스를 만들었다. 산책 후엔 천천히 샤워를 하는데 샤워 후엔 늘 조금 노곤해진다. 그 기분이 싫지 않아 깜빡 졸기도 하지만 대개 이제 그만 일하러 나갈 시간이다. 출근이 없는 날은 오후 내내 개인 작업을 한다. 방송 원고를 쓰거나 강의안 만들기가 주 업무. 이렇게 단순한 날들이 졸졸졸 흘러가는 것이 느껴질 때 나는 행복하다.

 

나의 단순한 일상이 생각만큼 쉽게 얻어지는 건 아니다. 오죽하면 일상이 유리 같다고 말했을까. 한 번만 삐끗해도 와장창 깨진다. 어쩌면 저번 일 년에 며칠 없는, 그러니까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일상일 뿐인지 모른다. 나는 여전히 자주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숙취 속에서 깨어나기도, 먹고 살 일에 대한 걱정 속에 일이 손에 안 잡혀 방황하기도 한다. 그리고 깨진 구슬의 파편을 조각조각 모아 다시 붙이기 위해 안간힘 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일상이란 사실 이런 것이다.

 

수많은 위기를 잘 넘기고 일상을 단순하게 정돈하면 좋은 점이 많다. 내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 지 잘 보이니 마음을 놓치는 일이 드물다. 자연히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된다. 오늘 내 몸과 마음은 어떤지,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고민할 만한 것들을 고민하고 그 밖의 것들엔 덜 신경 쓴다. 휩쓸리지 않고 자기 길을 찾고 걸어가는 힘을 기르는 것, 내가 생각하는 자기 계발의 의미다. 그래서 나는 어제와 같은 하루를 사는 오늘이, 오늘과 비슷할 내일이 좋다. 

 

하루의 기술

빈 방의 빛을 봅니다

차의 나라 일본에서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때 작고 텅 빈 차실에서 오직 차만 내놓는다고 한다. 상대에게만 집중한다는 의미, 오로지 차를 음미하도록 하는 배려가 담겨있다. 일본의 차실처럼 내 집이나 방도 나를 보살피며 일상의 오묘한 멋을 온전히 느끼는 공간이 될 수 없을까.

 

마침 이사를 앞두고 평소 관심 있던 미니멀 라이프 관련 카페에 가입했다. 그곳엔 간증과도 같은 버리기 후일담이 넘쳐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버렸는지, 무엇을 버렸는지 읽는 것만으로 해방감이 밀려드는 듯 했다. 한 달 동안 쓰지 않은 물건이나 더 이상 설레지 않는 물건을 버려라 같은, 몇 가지 지침에 따라 나도 나를 둘러싼 수많은 물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인색하고 무관심했는지 깨달았다.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주고 싶지 않았구나.’

 

다리가 고장나 앉을 때마다 기우뚱대는 의자부터 개봉한 지 10년이 지난, 내 얼굴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조 화장품까지 버릴 물건은 매일 쏟아져 나왔다. 가장 많이 버린 건 옷이었다. 쓰레기로 전락한 옷가지를 살펴보니 해지거나 맞지 않아 버리는 옷은 거의 없었다. 유행을 좇아 잘 살펴보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쉽게 사들인 것들뿐이었다.

 

버리기의 만족감은 역시 대단했다. 그런데 버리고 돌아서서 또다시 비슷한 방식으로 옷이며 물건을 사들이는 나를 발견했다. 문제는 물건이 아니라 물건을 대하는 내 방식이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물건을 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생활의 과제를 해치우고자 물건을 대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였다. 내게 물건은 아무렇게나 쓰고 버릴 무언가였다. 일상을 대하는 마음도 비슷했을 것이다. 목표가 달성되거나 조건이 충족될 그 언젠가를 위해 지금의 즐거움을 유예하는 불완전한 상태, 과거의 내게 일상이란 그런 것 아니었을까. 아무거나 쌓아뒀다 버리기를 반복하는 삶을 멈추어야 했다.

 

대대적으로 물건을 정리하고 나니 내게 기쁨을 주는 물건이 드러났다. 대개 예산을 고민하며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산 것들이다. 차에 입문하며 처음 들인 4인조 찻잔 세트가 그렇고, 재질에 따라 가격이 크게 차이 났던 머플러들 중 직접 만져보고 가장 감촉이 좋은 걸로 눈 꾹 감고 구입한 캐시미어 머플러가 그렇다.

 

단출해진 살림 사이에서 가장 좋은 에너지를 주는 물건은 역시 책이다. 물건이 늘어나는 걸 경계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종이책만큼은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다. 책의 내용뿐 아니라 어쩌면 책의 물성 자체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다 보니 책에 파묻혀 살아가지 않으려면 소장할 책을 눈물겹게 선별해야 한다. 닮고 싶은 삶을 살아간 저자들의 책을 잘 보이게 꽂아두는 것은 여전히 어떻게 살지 소신이 부족한 나를 다그치는 장치랄까. 법정 스님부터 데이비드 소로우와 헬렌 니어링까지 스무 살 무렵 내가 접한 최초의 미니멀리스트들이 그 공간의 주인이다. 자연과 연결되어 물질주의에 저항한 선구자의 위대한 삶을 담은 에세이는 존재만으로 무심한 위로가 된다.

 

지금 내 침실에는 내게 꼭 필요한 것, 내게 잘 어울리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 남았다. 정확히는 침구 한 벌과 의자, 얼마 안 되는 옷을 수납한 붙박이장 그리고 아끼는 책들뿐이다. 내게 필요한 물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차 마시는 공간에서 영감을 받고 시작한 정리였지만 내가 아는 최고의 맥시멀리스트 우리 언니는 내 침실을 보고 이렇게 평가했다. “절 방 아니면 정신병원 독방 같아.” 아무려면 어떤가. 어느 쪽이든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공간이니.

 

비움이라는 긴 선택 끝에 내가 얻은 건 살아가는 날들의 달콤 쌉싸름한 순간을 온전히 느끼게 된 여유였다. 아무것도 없는 방 작은 창으로 햇빛이 밀려들면 나는 그 빛을 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빛은 점차 구석으로 밀려간다. 그 빛 아래서 나는 지금 여기서 살아 숨 쉬는 나를 느낀다. 이런 기쁨을 느끼는 데 필요한 건 오직 한 조각 빛이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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