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맑음속초10.2℃
  • 황사4.1℃
  • 흐림철원5.0℃
  • 흐림동두천5.0℃
  • 흐림파주5.4℃
  • 맑음대관령1.1℃
  • 흐림춘천6.1℃
  • 천둥번개백령도6.5℃
  • 황사북강릉9.4℃
  • 맑음강릉9.5℃
  • 맑음동해8.2℃
  • 황사서울5.7℃
  • 황사인천5.9℃
  • 맑음원주5.2℃
  • 맑음울릉도9.1℃
  • 황사수원5.2℃
  • 맑음영월3.6℃
  • 맑음충주3.0℃
  • 맑음서산5.2℃
  • 맑음울진8.6℃
  • 박무청주6.5℃
  • 황사대전6.2℃
  • 맑음추풍령3.9℃
  • 맑음안동3.4℃
  • 맑음상주6.0℃
  • 맑음포항8.8℃
  • 맑음군산5.8℃
  • 박무대구5.6℃
  • 박무전주6.3℃
  • 맑음울산7.7℃
  • 맑음창원5.6℃
  • 박무광주7.4℃
  • 맑음부산9.4℃
  • 맑음통영7.8℃
  • 맑음목포7.8℃
  • 맑음여수8.5℃
  • 박무흑산도8.4℃
  • 맑음완도6.5℃
  • 맑음고창6.4℃
  • 맑음순천4.5℃
  • 황사홍성(예)5.7℃
  • 구름조금5.2℃
  • 맑음제주9.7℃
  • 맑음고산11.1℃
  • 맑음성산6.6℃
  • 맑음서귀포10.1℃
  • 맑음진주5.1℃
  • 구름많음강화5.8℃
  • 흐림양평4.7℃
  • 흐림이천4.7℃
  • 구름조금인제5.9℃
  • 구름많음홍천3.2℃
  • 맑음태백3.4℃
  • 맑음정선군2.7℃
  • 맑음제천1.9℃
  • 맑음보은2.5℃
  • 흐림천안3.4℃
  • 흐림보령6.8℃
  • 구름많음부여5.8℃
  • 맑음금산2.4℃
  • 맑음5.7℃
  • 맑음부안7.3℃
  • 맑음임실3.2℃
  • 맑음정읍5.0℃
  • 맑음남원4.3℃
  • 맑음장수1.2℃
  • 맑음고창군5.4℃
  • 맑음영광군7.4℃
  • 맑음김해시7.3℃
  • 맑음순창군4.9℃
  • 맑음북창원7.0℃
  • 맑음양산시7.5℃
  • 맑음보성군6.8℃
  • 맑음강진군5.5℃
  • 맑음장흥4.8℃
  • 맑음해남6.2℃
  • 맑음고흥5.9℃
  • 맑음의령군3.7℃
  • 맑음함양군3.6℃
  • 맑음광양시7.5℃
  • 맑음진도군7.0℃
  • 맑음봉화2.2℃
  • 맑음영주5.0℃
  • 맑음문경3.8℃
  • 맑음청송군3.2℃
  • 맑음영덕9.3℃
  • 맑음의성4.0℃
  • 맑음구미4.0℃
  • 맑음영천4.5℃
  • 맑음경주시5.6℃
  • 맑음거창2.2℃
  • 맑음합천3.9℃
  • 맑음밀양6.2℃
  • 맑음산청4.7℃
  • 맑음거제7.3℃
  • 맑음남해9.8℃
  • 맑음5.9℃
기상청 제공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마음속에 새기고 싶은 인생의 키워드 20
정여울 지음 | 이승원 사진 | 21세기북스 | 2020년 3월 | 360쪽

그림2 (3).jpg
북집

 

■ 책 소개

 

어른인 척, 행복한 척하느라

외롭고 불안한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30대는 인생에서 ‘나’에 대해 가장 많은 생각을 하는 시기일 것이다. 빛날 줄 알았던 20대를 그냥 흘려버린 것 같은 마음에 후회되고, 제대로 이뤄놓은 건 없는데 일터에서는 점점 책임을 요구하고, 결혼과 출산, 육아 등 결정할 것들은 많은데 어떤 것이 나은 선택일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민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가장 찬란하면서도 가장 외로웠던 자신의 30대를 되돌아보며,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나이, 포기, 선택, 독립, 관계, 자존감, 습관, 후회, 균형 등 20개의 키워드로 풀어냈다.

 

단순한 위로와 응원, 그리고 공감을 넘어 고독의 가치, 마음의 맷집을 키우는 연습, 내면의 아픔을 다루는 법과 같이 문학과 철학, 심리학을 넘나들며 깊이 있는 통찰을 선사하기도 하고, 바쁜 일상 속에서 삶에 작은 여백을 만들 수 있는 노하우를 들려주기도 한다.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감정에 대한 생각, 작고 사소한 것들이 빛나는 순간에 대한 예찬 등 삶을 바라보는 저자 특유의 섬세한 시선이 40여 장의 사진과 함께 어우러져 보는 재미를 더한다.

 

■ 저자 정여울

매일 글 쓰는 사람, 쉬지 않고 꿈꾸는 사람.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드러내며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인문학, 심리학, 글쓰기에 대한 강연으로 전국의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붙잡지 않으면 자칫 스쳐 지나가버릴 모든 감정과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과 KBS1라디오 〈백은하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을 진행하고 있으며, KBS1라디오 〈김성완의 시사夜〉에 출연 중이다. 저서로는 심리 치유 에세이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한 산문집 『마음의 서재』 외에도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헤세로 가는 길』 『공부할 권리』 『빈센트 나의 빈센트』 『마흔에 관하여』 『월간 정여울』 『그림자 여행』 『시네필 다이어리』 등이 있다.

 

■ 사진 이승원

사진을 찍고,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매고, 글을 쓰는 사람.

 

저서로 『나에겐 국경을 넘을 권리가 있다: 시 읽는 여행자』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사라진 직업의 역사』 『학교의 탄생』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그래도 눈부신 그대에게

 

PART 1 나,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나이 : 세상이 나에게 부여한 숫자

나이에 맞는 삶이란

늙어가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보다 어린 스승을 모신다는 것

 

소개 :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는 시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쓰기, 자기소개서

나의 가면이 나의 진심을 짓누를 때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의 축복이 곧 ‘나’다

 

포기 :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기회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기대와 희망으로부터 벗어날 용기

철없는 희망보다 허심탄회한 포기가 빛나는 순간

 

선택 : 인생은 객관식이 아니다

마음의 질병, 선택중독증

주저하고 망설이다 놓쳐버리는 것들

인생을 바꾸는 선택은 의외로 간단하다

 

독립 : 경제적 독립을 넘어 정서적 독립으로

우리 마음엔 영원히 자라지 않는 내면아이가 있다

타인과 같이 있을 때도 ‘혼자’를 즐기는 법

‘어른스러움’과 진짜 ‘어른’의 차이

 

PART 2 외로움 앞에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관계 :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그저 좋은 사람

친한 사람을 멀리, 싫어하는 사람을 가까이할 수 있을까

고독,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거절의 윤리, 거절의 에티켓

 

자존감 : 나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

자존감보다 중요한 마음의 기술

마음의 맷집을 키우는 연습

더 커다란 나를 만나기 위하여

 

소외 : 문득, 내가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

누가 뭐라든, 나는 나답게 살아갈 것이다

‘가면 뒤에 숨은 인격’의 위험

단순한 소통을 넘어 진심어린 공명에 이르는 길

 

상처 : 나에게 마음껏 아파할 기회를 주자

연약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의 차이

마음속 화를 피하는 나만의 공간

 

걱정 : 고민의 질량을 숫자로 따질 수만 있다면

우리의 마음이 늘 불안한 이유

마주하기 싫은 그림자와 대면한다는 것

그림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

 

PART 3 일상에 여백이 필요한 순간들

습관 : 삶에도 뺄셈이 필요하다

진정한 휴식은 감정의 무게를 줄이는 것

매일 1밀리미터씩 나를 바꿀 용기

내 마음의 월든을 가꾸는 습관

 

직업 : 일하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나의 일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법

내 안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한 사람을 위하여

 

기다림 : 어쩔 수 없는 시간을 견디는 힘

인생이란 어쩌면 기다림의 박물관

마음의 한계를 정하지 않는 진정한 기다림

기다림이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껴안는 것

 

생각 : 생각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을 생각하는 시간

생각을 풍요롭게 만드는 비결, 호기심과 배려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나만의 보물

 

우연 : 마음껏 부서지고, 무너지고, 깨질 준비를 하자

삶을 사랑하는 자의 여행법

머리가 아닌 발자국이 주인이 되는 시간

작고 사소한 것들이 빛나는 순간

 

PART 4 평생 후회할 일을 저지를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순간 : ‘오늘’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현재’라는 이름의 눈부신 선물

시간의 흐름을 보는 시선을 바꾸자

그리움이 우리를 좀 더 인간답게 만든다

 

이기심 : 내 안의 잔인한 ‘사피엔스’를 넘어서

사랑과 미움의 공통점

가장 끊어내기 힘든 마음, 사심

나도 모르게, ‘나 너머’를 꿈꾸는 순간

 

용기 :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내면의 힘

눈물이라는 마음의 비상구

운명과 맞서 싸울 용기

두려움을 고백하는 것은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후회 : 그때 고백했더라면, 그때 도전했더라면

나는 후회중독자다

후회를 내 편으로 만드는 법

뼈아픈 반성이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균형 : 삶의 온도를 조절하는 법

지금이 ‘바닥’이라 느껴질 때

사람다운 삶의 온도, 36.5도의 밸런스

외부의 소리와 내면의 소리, 그 ‘균형’을 위하여

 

에필로그 이 세상에 ‘하찮은 감정’이란 없다

 

x9788950985288.jpg
정여울 지음/이승원 사진/21세기북스/2020년 3월/360쪽


나,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소개 :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는 시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쓰기, 자기소개서

이상하게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이 부끄러움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온갖 숫자를 통해 증명하기를 요구받을 때,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다. 내가 누구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왜 주소와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와 신용카드번호를 내밀어야 할까.

 

존재의 자기증명을 숫자로 요구받는 생물은 지구상에서 인간뿐이지 않을까. 입학할 때, 입주할 때, 입사할 때, 입국할 때, 그 모든 ‘출입’의 순간에 우리는 존재의 뚜렷한 자기증명을 요구받는다.

 

평소에는 내가 누구인지 심각하게 묻지도 않다가 어떤 경계나 문턱을 넘을 때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느닷없이 생각해내야 한다.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순간이야말로 내가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순간일 것이다.

 

얼마 전, 수능보다도 ‘자기소개서’ 쓰기가 더 고민이라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능에는 정답이라도 있지만 자기소개서에는 모범 답안이 없으니, ‘세상에 하나뿐인 나’를 한 편의 글로 표현하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인생에서 아직 굵직굵직한 경험이 없는 나이임에도 사소한 동아리 활동 등에 어떤 엄청난 의미부여를 해야 하니,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소설’을 쓰는 것 같다고 하소연하는 아이들도 있다.

 

글쓰기가 직업인 나조차도 자기소개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로 다가온다. 책을 낼 때마다 책날개에 ‘프로필’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는 일이 본문을 채우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내 마음이 이미 책 속에 구구절절 드러나는데, ‘나’를 프로필이라는 형식에 맞춰 또다시 표현하는 게 불필요한 동어반복처럼 느껴졌다. 너무 멋들어지게 쓰면 나를 속이는 일 같아 죄책감이 들 것 같았다. 강의를 할 때마다 매번 이력서를 요구하는 곳도 많다. 지금은 불가피하게 이력서를 쓸 때마다 최대한 소박하게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만 쓴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엄청난 자기분열이 있었다. 글을 통해 나를 멋지게 포장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고, 글을 통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을 성공적으로 감춰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다. 글은 이렇듯 나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는 것이기에, 차마 길들이지 못한 나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는 좀처럼 표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 표현하기 어려운 그림자야말로 진정한 나 자신에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포기 :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기회

철없는 희망보다 허심탄회한 포기가 빛나는 순간

사실 나는 어머니보다도 아버지와 더 친한 딸이었다. 우리 둘은 통하는 게 많았다. 아버지는 책을 좋아했고, 학자로 살고 싶어 했지만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그 길을 포기했다. 그리고 우리 세 딸을 세상 무엇보다 아꼈다.

 

그토록 다정했던 아버지가 10여 년째 뇌경색을 앓고 있고, 성격도 가치관도 돌변해버렸다. 병이란 게 정말 무서운 것은 몸만이 아니라 마음의 성격까지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제 예전처럼 타인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건강에만 관심이 있고,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좀처럼 눈치 채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당황스럽다. 다정하고 사려 깊고 친절한 우리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저토록 낯선 노인이 우리 집 안방에 앉아 있는 걸까.

 

너무 기가 막혀 한참동안 망연자실한 적도 있다. 길에서 아버지의 옛 모습을 닮은 노인을 만나면, ‘혹시 잃어버린 우리 아버지가 아닐까’ 싶어 나도 모르게 쫓아가다 가슴이 미어진 적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힘들게 살아가지만 자애롭고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면 꼭 잃어버린 나의 아버지 가아 느닷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예전으로 돌아올까, 돌아오지 못할까’를 걱정하지 않는다. 이제는 ‘예전의 아버지를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는 열망을 포기했기에, 아직은 낯설고 가끔은 섭섭한 아버지의 모습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 아직은 아버지가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너무 많이 걱정하는 것도, 너무 많이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당사자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조심해라’라는 어머니의 조언이 때로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항상 조심만 하다가는 새로운 모험을 할 수 없으니까. 항상 걱정만 하다가는 인생을 제대로 즐길 수 없으니까. 부모님이 살아계신 오늘, 걷고 말하고 듣고 볼 수 있는 오늘을 사랑하고 즐기자.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더 이상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우리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라는 절망적인 물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걱정의 범위를 좁히고, 기대의 범위를 좁히자. 대신 살아 있는 오늘, 아직 사랑할 수 있는 기회, 아직 서로를 보살필 수 있는 축복에 감사하자. 

 

외로움 앞에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상처 : 나에게 마음껏 아파할 기회를 주자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의 차이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내가 가장 큰 효험을 본 마음 챙김 연습은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구분하는 것’이다. 예컨대 강의가 여러 개 몰려 있는 날에 느끼는 압박감은 ‘스트레스’다. 시험에 대한 공포나 교통 체증에 대한 짜증도 그렇다. 시험이 끝나고 교통 체증이 끝나면 스트레스는 사라진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시지포스의 형벌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픔이다.

 

스트레스는 우리의 힘으로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 교통 체증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출발한다든지, 시험 준비를 미리 열심히 해놓는 것으로도 스트레스는 대폭 줄어든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노력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총격이나 테러 같은 심각한 사건이 바로 트라우마가 된다.

 

트라우마는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구별 짓는 치명적인 상처다. 스트레스가 국소 부위 통증이라면 트라우마는 뇌혈관 질환인 셈이다. 스트레스는 일시적 기분이지만 트라우마는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관건은 자신의 상처가 스트레스인지 트라우마인지 차분히 성찰해보는 것이다. 상처를 과대평가하면 스트레스를 트라우마로 착각해서 엄살을 부리게 되고, 상처를 과소평가하면 트라우마를 스트레스로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나중에 큰코다치게 된다.

 

습관적으로 ‘나 우울증인가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은 ‘우울한 기분’과 ‘우울증’을 혼동할 때가 많다. 우울증에는 전문적 치료가 필요하지만 우울한 기분은 산책을 하거나 수다를 떠는 것처럼 평범한 기분 전환으로도 충분히 떨쳐낼 수 있다.

 

미디어를 통해 들리는 정신 질환의 가짓수가 급격히 늘어난 현대 사회에서는 일시적 기분과 심각한 증상을 혼동할 가능성이 높다. 몸이 많이 피곤한 상태를 ‘번아웃증후군’이라고 착각하고, 기분 변화가 심한 상태를 ‘조울증’이라고 착각할 위험이 늘어난다.

 

심각한 트라우마를 별 것 아닌 스트레스로 착각하고 가볍게 여기는 경우도 많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자기암시를 자주 하는 사람들이 특히 그렇다. 사실 나도 이런 쪽이다. 나는 강의를 할 때 사람들이 잠깐 졸거나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해도 며칠 동안 벙어리냉가슴을 앓는다. 강의에 대해 비판받으면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 상처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돌이켜보니 초등학교 시절 무슨 발표를 하다가 크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던 그 소름끼치는 느낌’이 생생히 살아남아 여지껏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 상처는 무려 30년이 지나서도 아직도 내 ‘말하기 습관’의 어디엔가 떼어낼 수 없는 거대한 혹처럼 매달려 있다.

 

나는 ‘남들 앞에서 말하기’에 엄청난 공포를 느꼈던 내 안의 내면아이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너무 하찮은 일이야’라는 생각했던 의식의 통제가 문제였던 것이다.

 

심리학자 융은 말한다. 무의식은 괴물이 아니라고. 의식이 무의식의 문제를 깨닫는 순간, 무의식은 더 이상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조스’같은 괴물이기를 멈춘다. 우리가 억누를수록 무의식의 위험은 더 커진다.

 

무의식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내 공포가 의식화되자 비로소 두려움이 가라앉았다. 이제 나는 속 시원히 고백해버린다. “제가 무대공포증이 있어서요.” 그럼 거짓말처럼 두려움이 완화된다.

 

상처 없이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상처와 더불어 공생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내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그 상처와의 평화로운 동고동락은 시작된다. 

 

일상에 여백이 필요한 순간들

기다림 : 어쩔 수 없는 시간을 견디는 힘

인생이란 어쩌면 기다림의 박물관

가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킨 마음가짐은 무엇일까. 실제로 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내가 한층 성숙해질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기다림’이었던 것 같다.

 

기다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정확한 기다림의 대상과 목적이 있는 경우.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건강검진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이 목적의식이 뚜렷한 기다림. 두 번째 기다림은 뚜렷한 목적 없이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의 상태다. 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좋은 소식을 기다릴 때도 있고,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문득 누군가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을 보면 걷잡을 수 없이 그리움이 밀려들기도 한다.

 

우리를 한층 깊게 성장시키는 기다림은 바로 이런 ‘목적의식 없는 기다림’, ‘때로는 나조차도 기다린 줄 몰랐던 무의식적인 기다림’이다. 돌이켜보니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것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는 것만 같은 뜻밖의 가슴아린 만남. 이제는 제목조차 희미한 추억 속의 음악을 어느 날 레코드 가게 앞에서 다시 듣는 순간. 어린 시절 일기장을 우연히 발견하는 순간처럼,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소중한 추억과 느닷없이 재회하는 순간을.

 

누군가를 갑작스레 만났을 때, ‘아, 나는 저 사람을 우연히라도 다시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으며 눈물겹게 반가워하는 것처럼. 때로는 현실이 우리의 기다림을 좌절시킬지라도, 나는 무언가를 맹렬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무언인지도 모르면서. 그 간절함만은 미치도록 진심인, 그런 기다림이 나를 오늘도 일으켜 세운다.

 

우연 : 마음껏 부서지고, 무너지고, 깨질 준비를 하자

머리가 아닌 발자국이 주인이 되는 시간

머릿속이 난마처럼 얽혀버린 시간, 어떤 위로로도 불안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시간, 그럴 때 나는 무작정 산책을 나간다.

 

한낮의 산책도 좋지만 가장 매혹적인 산책은 역시 밤중이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얼굴선보다는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의 희미한 실루엣이나 앞서가는 이의 뒷모습이 더 잘 보이는 시간. 외출복으로 갈아입을 필요도 없이 그저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어슬렁거릴 수 있는 시간.

 

일감의 실마리가 영 풀리지 않을 때, 차라리 살짝 포기하는 심정으로 무작정 산책을 나가면 신기하게도 돌아오는 골목 어귀에서 싱그러운 착상이 떠오르곤 한다.

 

밤 산책은 목적이 없을수록 좋다. 쓰레기봉투를 사러 나간다든지, 비누나 치약을 사러 나가는 정도의 가벼운 목적을 넘어서지 않는 게 좋다. ‘건강을 위해 열심히 걸어야겠다’는 욕심도 금물이다. 건강 자체가 또 하나의 강박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별다른 목적이 없는, 정처 없는 발걸음은 우리의 ‘머리’가 아닌 ‘발자국’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일깨워준다.

 

사랑의 진실성을 체크하는 방법도 ‘그 사람과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걷고 싶은가’로 판별할 수 있을 것 같다. 포옹하고 싶은 사람, 밤을 보내고 싶은 사람, 키스하고 싶은 사람은 바뀔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나 세상 끝까지라도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은 결국 하나가 아닐까.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시리즈로 전 세계 영화팬들을 열광시킨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천재성도 바로 이 은밀한 걷기 예찬에 있는 것 같다. 셀린(줄리 델피)은 첫 만남 이후 9년 만에 제시(에단 호크)를 만나 고백한다. 유럽 횡단 열차에서 충동적으로 널 따라 내려 비엔나의 땅을 밟는 순간, 너와 함께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고.

 

연애가 시작되는 순간은 ‘우리 사귀자’고 청유하는 순간일 수도 있고, 돌발적으로 첫 키스를 하는 순간일 수도 있고, 수줍게 상대방의 손을 잡는 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과의 합의로 시작되는 연애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사람과 함께 하염없이 걷고 싶어지는 순간, 와글거리는 인파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저 멀리 떨쳐내버리고, 다만 그 사람과 단 둘이서 걷고 싶어지는 순간, 그 순간이 내 마음속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를 20년에 걸쳐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오랫동안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연애의 욕망을 넘어선 사랑의 뜨거운 본질이 아닐까. <비포 미드나잇>에는 흥미로운 대사가 나온다. “우리 단둘이 이렇게 걸어본 게 얼마만이지?” 늘 육아와 가사 노동에 쫓기느라 단둘이 걸어 다닐 여유조차 없어져버린 셀린과 제시의 삶. 그들은 ‘결혼’에 충실하느라 문득 ‘사랑’에 소홀해져버린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본다.

 

오늘도 하루 종일 일거리를 싸안고 씨름하다가 도저히 풀리지 않아 포기하는 마음으로 밤 산책을 나갔다. 풀리지 않던 마음속의 화두들이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내 ‘산책자의 발’은 ‘고집스레 앉아만 있던 나의 머리’를 향해 자꾸만 낯선 말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일에 찌들지 않고 한가로이 밤산책의 묘미를 즐기는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뾰족한 하이힐과 무거운 서류 가방과 저마다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맨손으로 아무런 준비물 없이 수풀이 우거진 마을의 오솔길을 찬찬히 걷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천국의 페스티벌이 시작되는 순간은 바로 이때구나. 자동차의 경적 소리도, 휴대전화 가게의 호객 행위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시간. 어디론가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우리가 사는 평범한 동네가 천상의 놀이터가 되는 순간이다.

 

평생 후회할 일을 저지를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순간 : ‘오늘’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을 보는 시선을 바꾸자

해마다 연말이 되면 ‘왜 나는 제대로 이루어놓은 게 없을까’라는 후회와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 스스로를 쉬지 못하게 하는 걸까’ 하는 자책감이 동시에 든다. 성과나 효율성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항상 스스로를 ‘무언가 부족한 존재’로 바라본다.

 

스스로를 이렇게 바쁨의 수레바퀴로 밀어 넣는 것은 진짜 ‘일’ 자체가 아니라 일에 대한 우리의 걱정, 우리 자신의 가치에 대한 스스로의 가혹한 평가,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이 아닐까. 사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일의 목록을 쭉 늘어놓고 ‘꼭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가려보면, 내가 붙들고 있는 많은 일들이 꼭 ‘나의 필수불가결한 임무’는 아님을 알게 된다.

 

문제는 ‘바쁨’이 아니라, ‘연말’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시선이 아닐까.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너무 성과 중심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닐까. “새벽서리 밟으며 산에 올라가 나무하고 달뜬 밤이면 지붕 이을 새끼를” 꼬는 농부의 심정으로, 아무리 차디찬 한겨울에도 모두들 흥청망청 놀고 싶어 하는 연말 시즌에도 나는 ‘글’이라는 나의 연약한 새끼를 꼬면서 달과 별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용히 나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휘파람을 불며 봄나물 가득한 산등성이로 소풍 나갈 찬란한 봄날이, 내게도 오지 않을까.

 

이제는 바쁨으로부터 벗어나기라는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라 바쁨 자체를 받아들이고 바쁨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망중한의 여백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겠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거두어들이지 않은 것>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뭔가 모두 거두어들이지 않고 남겨두는 것도 좋겠다.

정해진 계획밖에도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면

사과든 뭐든 잊혀 남겨진 게 있다면

그래서 그 향기 마시는 게 죄 되지 않는다면.

 

정말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심은 모든 씨들을 남김없이 거두어들이려고만 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 수많은 꿈의 씨앗 하나하나를 그렇게 정성껏 보살폈는지. 그 모든 꿈의 씨앗들이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필사적인 열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내가 진짜로 거두어야 할 꿈의 씨앗’의 개수가 오히려 줄어드는 것을 보면, 어쩌면 성숙이란 ‘이룰 수 없는 열망에 집착하지 않는 기술’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잘해온 것, 굳이 욕심 부리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늘 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게 행복의 기술이 아닐까.

 

배고픈 까마귀를 위해 탐스럽게 잘 익은 홍시 몇 개를 나무 위에 일부러 남겨두는 농부의 마음으로, 그렇게 내 꿈의 사과나무 또한 ‘아직 따지 않은 채로’ 몇 개만 남겨두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끝없는 성취와 열망의 나날들에 지칠 날이 오면,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이루지 못했지만 못내 사랑하는 것들’의 힘으로 나를 위로하고 싶은 날에, ‘아직 수확하지 않은, 못 다 핀 그 꿈의 열매’가 나를 위로할 날이 있으리니.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20200805_092040.png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