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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을 두고 돌아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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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을 두고 돌아서 걸었다

마흔 넘어 떠나는 혼자만의 여행
박대영 지음|더난출판|2020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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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bookzip.co.kr)

 

■ 책 소개

 

“걷는 행위를 재발견하는 여정,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

 

흔히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면 일생 동안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뇌리를 스쳐간다고 한다. 그 후에 ‘나’라는 존재는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먼지가 되는지, 이집트의 신화처럼 육체를 벗어난 영혼으로서 긴 여행을 떠나는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있음 그 자체로 더욱 소중해진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우리는 점점 인생에 찾아오는 작은 죽음들을 분명하게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성년이 되고 30살을 지나면서 슬슬 ‘나이’를 자각하다가 마흔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지나온 시간을 두고 ‘세월’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한 소회에 젖는다. 마흔 이후를 두고 인생 2막, 인생 후반전 등으로 표현하는 이유도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른 분기점과는 다른 특별한 감흥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27년 차 방송기자인 저자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한과 추억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을 풀어내고 스스로를 달래어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걷기’라는 행위를 선택했다. 저자에게 걷는다는 것은 “몸이 전하는 수고스러움을 견디며 그저 두 발을 내딛기만 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일이며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일이자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이기도 하다. 그러니 목적지는 어디라도 좋고 가는 그 길이 굳이 지름길이 아니어도 좋다.

 

이 책에는 풍경과 하나가 된 그들의 모습과 이곳저곳에 숨겨진 평범하지만 진귀한 풍경들을 담은 50여 장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완벽한 구도로 철저히 계산된 순간이 아니라, 조금 투박하지만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사진들이기에, 맑게 갠 어느 날 스스로를 다독여 저자의 발걸음을 따라 훌쩍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풍경에도 철이 있다. 철이 든다는 것은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저자는 기막힌 제철 과일처럼 상큼하고 속이 탁 트이는 순간들을 모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한 문장 한 문장에 정성을 담았다.

 

■ 저자  박대영

앞만 보고 달렸고,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 그러다 문득 중년이라는 고갯마루에 멈춰 서서 지나간 날들을 되돌아본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진 시기가 아마도 마흔 즈음이었을 것이다. 조금은 고달프고 아쉬웠던 삶의 여백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채워야 했다. 그 방법은 바로 느려도 늦지 않은 삶, ‘걷기’였다. 때때로 지름길을 두고 돌아서 걸어도 좋았다. 잊고 살았던 싱그러운 바람을 느끼며, 수줍은 듯 고운 들꽃의 미소에 화답하기도 하면서 걸었다. 그 길 위에는 새로운 삶이 있었다. 정겨운 사연들은 아마도 덤이었을 것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었고, 그곳이 어디든 걸어야 할 이유 또한 충분했다.

 

현재는 SBS에서 27년 차 방송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한적한 어느 산골에서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별을 헤고픈 소망 하나를 보석처럼 품고 살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_ 길에서 주워 백팩에 담아온 이야기

 

제1장 계절을 알고 철이 든다는 것

[파주 감악산 둘레길] 제아무리 험해도 길은 길일 뿐

[문경새재 과거길]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선자령 풍차길] 바람의 언덕에서 세상을 노래하다

[명성산] 억새와 춤을

[설악산 주전골] 아! 단풍이여, 단풍이여

[내변산] 길과 길 아닌 곳의 경계를 묻다

 

제2장 어렵게 얻은 인생이라는 입장권

[태안 솔향기길 제1코스] 걷는 과정을 즐길 줄 안다는 것

[온달평강 로맨스길] 온달을 다시 생각하다

[여주 여강길 제1코스 옛나루터길] 흐르되 흐르지 않는 강물처럼

[함양 상림] 천년 숲의 숨결을 느끼다

[백화산 둘레길] 여행이란 무엇인가

[영덕 블루로드 B코스] 바다, 등대, 그리고 목이 메는 그리움

 

제3장 흔들면 흔들려야 안전하다

[양평 대부산]자유는 자기라는 이유로 걸어가는 것

[태백 함백산 종주기]가을산, 붉음에 취하다

[지리산 둘레길] 제3코스 ①아! 지리산

[지리산 둘레길] 제3코스 ②아! 빨치산

 

제4장 무수한 오늘이 가라앉은 길 위에서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선비를 다시 생각하다

[남한산성 둘레길]무능한 리더, 절망하는 나라

[강화 나들길 제2코스(호국돈대길)]파도에 씻기지 않는 흔적

[수원화성 성곽길]정조의 꿈, 조선의 꿈

 

제5장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다

[군산 선유도 둘레길]섬은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금오도 비렁길]길의 원류를 찾아서

[제주 쫄븐갑마장길]고요의 강을 건너 오름을 오르다

[제주 올레길 제21코스]끝이 다시 시작이다

 

에필로그_ 길의 끝에서 다음 길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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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영 지음/더난출판/2020년 03월

 

계절을 알고 철이 든다는 것

[파주 감악산 둘레길] 제아무리 험해도 길은 길일 뿐

길 위로 봄이 지천이다

봄날의 햇살은 화사하다 못해 눈이 부셔 좀이 쑤실 지경이다. 봄이 왔으니 그 봄을 영접하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자유로를 내달려 도착한 곳은 북녘땅 마식령산맥에서 출발한 물줄기가 한탄강과 어우러져 임진강이 되어 흐르는 곳, 파주의 끝에 위치한 감악산(紺嶽山)이다.

 

산으로 난 길을 오르자, 투명하기까지 한 푸르른 녹음에 눈이 시리고, 봄에 물든 산은 그야말로 연초록 물감 천지다. 그래서인지 오솔길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봄날은 기어이 많은 사람들을 산으로 내몰고 말았다. 이들의 목적지는 대부분 감악산 출렁다리다. 출렁다리를 지나면 진달래가 지천이다. 데크로 이어진 길에는 햇살 머금은 꽃들이 야한 몸짓으로 연신 유혹을 하고, 그 유혹에 넘어가려는 찰나에, 어디선가 물소리라 아스라하다. 비룡폭포라 불리기도 하는 운계폭포다.

 

운계폭포를 벗어나면 길은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지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감악산 둘레길이다. 감악산 둘레길은 파주시와 양주시, 그리고 연천군을 지나는 순환형 둘레길로, 총 5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길이는 21킬로미터로, 열심히 걸으면 하루만으로도 충분히 완주가 가능하다.

 

고요하고 나른한 청산계곡길을 걷다

감악산 둘레길 각 코스의 이름들은 생경하면서도, 정겹고 또 친근하다. 청산계곡길이며, 손마중길, 천중바윗길, 임꺽정길, 하늘동네길 같은 이름들은 이 지역의 학생들이 전 코스를 답사한 후에 길의 특성에 맞게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출렁다리에서 북적이던 많은 사람들이 둘레길에서는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홀로 걷는 봄길이 고요하고 또 나른하다. 길은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다. 아직은 메마른 계곡이지만, 산은 몰래몰래 품었던 물을 조금씩 풀어놓고 있었던지라, 간간이 또르르 구르는 계곡 물소리가 그윽하고 또 청아하다.

 

봄날의 길을 걷다보면, 아무래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들꽃이기 마련이다. 감악산 가는 길에도 붓꽃이며, 제비꽃, 개별꽃, 양지꽃, 고깔제비꽃 등이 길 가장자리에서 홀로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꽃씨 하나가 기어이 꽃을 틔워 올렸던 것이다. 제 삶이 비록 작고 또 여려도, 자신이 그곳에 살고 있음을 짙고 고운 색감으로 드러내며, 수줍은 듯 지나는 이의 손을 잡아끈다.

 

제아무리 험해도 길은 길일 뿐

길은 장군봉을 향해 꺾으며 이어진다. 이제는 본격적인 산행이다. 짧은 오르막길을 벗어나자 진달래가 휘황한 빛을 뿜어낸다. 온 사방이 진달래 천지다. 하지만 꽃들이 사는 곳치고는 험난하다. 길은 기어이 악산(嶽山)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는 의사가 분명해 보였다.

 

경사는 급격히 가팔라지고, 그마저도 바위를 타고 올라야 하는 곳도 여럿이다. 더러는 걷는 것이 아니라 기어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지만, 그마저도 사람의 일일뿐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산이 높아지자, 평화로운 에너지는 없다더니 고난의 길이 전투력을 부쩍 키우는 모양새다. 다행인 것은 길은 험해도 진달래와 동행하였으니, 그나마도 꽃길이라면 꽃길이랄 수 있는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장군봉은 생각 외로 수수했고, 그저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한 커다란 바윗덩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바위틈에서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소나무며 꽃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조금은 애처롭고, 또 조금은 감동스럽기까지 한 일이었다. 흙 한 줌, 물 한 방울도 없을 것 같은 바위틈에도 기어이 뿌리를 내려야 했던 그들의 불운한 삶마저도, 생을 유지하겠다는 의지 앞에서는 그다지 큰 장애기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내야 한다는 절박함과 간절함이었을 것이다.

 

하나의 봄을 떠올리다

한 바가지의 땀은 족히 흘리며 다다른 곳, 드디어 감악산 정상(675m)이다. 포기를 종용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기어이 오른 정상이건만 정상의 모습은 특별한 감흥을 주기에는 조금은 아쉬운, 휑한 헬기장이었다. 사실 감악산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러 산의 정상에 올랐지만, 대체로 정상은 내가 왜 여기를 오르려고 그토록 애를 썼는지 스스로도 의문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산이 그렇듯 인간사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하산이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은 또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바위와 돌멩이 천지다. 길이라기보다는 계곡 그 자체였다. 그러니 바위와 바위를 건너뛰는 뜀뛰기의 연속이다. 그래서인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은 나이도 아니라며, 무릎이 나이 든 티를 내려 한다. 아서라,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단다.

 

길은 험해도 산색은 여전히 푸르렀고, 바람마저 싱그러웠다. 길과 계곡이 서로 어우러져 이어지는 하산길이 아니었다면 더없이 좋았을 것을…. 실로 길과 계곡의 경계는 애당초 중요하지 않았고, 계곡이 길이고 길이 곧 계곡이었다. 그나마 가끔씩 멈춰 서 바라본 푸른 하늘과 그 아래의 푸른 나무들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뎅뎅뎅…. 산 아래 법륜사의 범종 소리가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른다. 불가(佛家)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중생들을 위해 범종을 두드린다는데, 과연 그러함인지 소란스럽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내변산] 길과 길 아닌 곳의 경계를 묻다

아이젠과 호흡을 맞추며

내변산(內邊山)이라는 이름은 198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변산반도 국립공원이 바깥변산(外邊山)과 안변산(內邊山)으로 구분되어 불리는 데서 기인한다. 외변산이 바다를 따라 이어지는 바깥 부분을 말하는 데 비해, 내변산을 변산 안쪽에 있는 남서부 산악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눈으로 뒤덮인 길은 아득하다. 눈에 갇힌 길은 온통 새하얀 탓에 기준점을 정하기가 어렵고, 길과 길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한 탓에 어디로 가야 할지 첫발을 내딛는 것부터가 망설여진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른 아침부터 길 위에 길을 내어준 부지런한 누군가의 손길과 발걸음이 있었기에 나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발밑에서 덜그럭대는 아이젠과의 호흡만 잘 맞추면 된다. 게다가 군 복무를 마친 지 오래지 않아 머리마저 짧은 아들과 함께 가는 길이라, 그냥 푸근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넌 길은 산을 오르고, 숲으로 난 길은 이내 눈꽃 터널을 이룬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눈꽃들이 분분하다. 바람에 흩어지는 눈들이 종횡(縱橫)을 넘나들며 안개처럼 그렇게 흩어지며 공간을 넘나든다. 무심히 걷고 있는 발길은 그래서 아득하고, 또 아득하다. 눈은 그렇게 안개처럼 바람에 실려 산과 나무와 사람 사이의 간극을 메우며 부서지고 있었다.

 

가슴속 뜨거운 정리를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분분한 눈꽃에 홀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걷는 사이, 길은 커다란 호수 앞에도 사람들을 데려다 놓는다. 직소보(直沼湺)라는 이름의 산정호수다. 이런 산속에도 호수가 있었구나. 얼어붙은 호수 위로 소복하게 쌓인 눈이 새하얀 화선지라, 붓질 한 번이면 설중(雪中) 산수화가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다. 그러니 어찌 놀랍지 않을까.

 

물끄러미 앞만 보고 걷던 아들 녀석도 생경한 풍경 앞에서 연신 스마트폰 카메라를 눌러댄다. 그럼에도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아비의 말에는 시큰둥이다. 저도 군대까지 다녀온 몸인데 아비라고 이래라 저래라 하니 살짝 튕겨보는 모양인지 조금은 뻣뻣하다. 어찌 보면 제 스스로 성인이라는 아이와 아비 간에 어느 정도의 긴장 관계는 필수가 아닐까 싶다. 마음속에 흐르는 그 뜨거운 정리를 어찌 다 말로 표현할 것인가. 무뚝뚝한 둘 사이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그 무엇도 있는 법이라고 믿고 싶다.

 

길은 언제나 사람에게로 향하는 법이다

길은 어느새 내변산 최고의 절경이라는 직소폭포에 이른다. 눈앞에 폭포가 있지만, 다가갈 수는 없다. 전망대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눈 덮인 언 땅 너머로 나아가고 싶지만 길은 눈 속에 갇힌 지 오래라,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숲으로 들어선 길은 나무와 나무 사이 가없는 설원 위에 그어진 외줄의 선분. 그리고 또 다른 선분을 그리며 이어진다. 긴 길의 끝에는 결국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을 것이다. 길은 제아무리 멀고 험한 골짜기를 지나더라도 결국은 사람에게도 향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인생사도 그러하다. 더러 오늘같이 눈이 내리는 날에는 길 자신마저도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제 가야 할 그곳으로 이어져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렇게 길은 반드시 이어져야 할 사람과 이어져 있다. 어느 경우에는 빠르게, 또 어느 경우에는 느리게…. 그래서 길을 잃고 헤매다 무릎이 깨져도 가야 할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용기를 갖고 걷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곳에 닿을 수 있다. 그곳에는 정다운 사람이 함박웃음 띤 얼굴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잘 노는 삶이 잘 사는 삶이다

가끔 우리는 일상에 지칠 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삶인지를 자문할 때가 있다. 잘 사는 삶이란 게 따로 있기는 할까 싶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슴 뛰는 설렘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좋은 사람과 더불어 작은 성취에도 행복을 느끼는 그런 설렘 말이다. 눈이 온다고, 꽃이 피었다고, 그리던 친구가 찾아왔다고, 맛있는 막걸리 한 잔에도 가슴이 뛰는 그런 유치함이 내 삶 속에 가득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무엇을 선택해서 삶을 재미있게 만들 것인가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뭘 해야 재미가 있다는 말인가. 쉬운 듯 하면서도 쉽지 않은 질문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어쩌면 노는 것도 공부와 연구가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앞서가는 이의 뒷모습이 아른아른하다. 숲길의 끝을 통과하는 그는 세상 밖으로 나서는 이의 출사표처럼 굳건하고 빛의 여운을 담은 그릇처럼 빛이 난다. 그리고 거친 길을 헤쳐 나온 이의 자부심마저 배어 있는 듯하다. 길의 끝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고, 그 사람 중에는 스스로에게 건네는 성취와 위로도 함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문득, 잘 사는 삶이란 뒷모습마저도, 그가 떠난 자리마저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렵게 얻은 인생이라는 입장권

[태안 솔향기길 제1코스] 걷는 과정을 즐길 줄 안다는 것

바다와 뭍의 경계, 그 위로 난 길

길은 바다와 동행하고 있다. 땅의 끝과 바다의 시작은 서로 잇닿아 있었지만, 더 이상은 나아가지 못했다. 길에게 바다는 욕망의 대상이었고, 동경이었으며, 그리움이기도 했으며, 또 두려움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길 위의 선 사람들의 마음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것이 길이든, 선이든, 금이든 경계 밖의 세상은 늘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계의 밖과 안은 서로의 타협점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이다.

 

길은 그 경계를 따라 아스라이 이어지고 있었다. 태안반도를 뒤덮고 있는 해송 숲 사이로 길이 이어져 있어서, 이름도 솔향기길이다. 그래서 어디선가 솔향이 길을 따라 비끼어 흐를 만도 한데, 초겨울의 해송들은 제 몸의 향기를 어딘가에 깊이 숨겨놓았던지 나의 무심한 코는 기어이 솔향을 깨닫지 못하였다.

 

처음 만나는 길을 걸을 때면 알 수 없는 설렘이 있다. 어쩌면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길인지라, 새로운 길과의 만남은 언제나 발견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 위에서 만날 생경한 풍경들이며, 길이 들려줄 많은 새로운 이야기들이며, 그 길 위에서 만날 인정 많은 사람들은 나의 기대와 설렘 안에서 실제 기대했던 그 무엇이 되기도 하는 까닭이다.

 

소리로 다가오는 풍경도 있는 법

무심히 해송 숲길을 걷다 보면 문득 파도가 친다는 것을 소리로 깨달을 때가 있다. 어느 바다, 어느 육지를 돌아 예까지 와서 두런두런 속삭이는지 그 이유야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갯바위에 부딪치고 또 부서지는 그들의 끈질김이 무심한 여행자의 감각을 오롯이 살려놓는다.

 

가끔은 조금 떨어져 대상을 바라볼 때 대상의 진면목에 다가갈 수가 있다. 아득히 귓전으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그러했다. 눈이 아닌 귀로 파도를 깨닫는 것은 눈이 보여주는 것,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걷는 어느 중간 나무 등걸에라도 기대앉아 가만히 머물며 파도 소리에 취해보고도 싶었다.

 

어떤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빈자리에 충만이 넘칠 때가 있다. 어쩌면 여행의 목적이 그러할 것이고, 지금 이 순간 파도 소리의 유혹 안에서 깨닫는 바도 그렇다. 가끔은 풍경마저도 소리로 다가와 자신 안에서 증폭되며 여행의 이유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걷는다는 것은 도착지가 아니라 과정을 걷는 것

길은 가막골 전망대를 지난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여섬은 지척이다. 어쩌면 수영을 해서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작은 폭의 바다가 섬과 육지를 구분 짓고 있었다. 섬과 육지 사이의 바다를 건너 바람이 분다. 얼굴을 스치며 지나는 바람 속에서 먼 길을 달려온 그들만의 뜨거운 땀냄새를 맡는다.

 

가끔 길을 걸을 때, 길이 건네는 다양한 이야기와 느낌, 그리고 길 위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아우성이며, 그들이 건네는 이런저런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그저 걷는 행위만이 전부인 양 허위허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왜 굳이 힘들게 멀고도 먼 이곳까지 걸으러 왔는지 회의감마저 든다. 걷는 다는 것은 세상과의 반가운 조우이면서, 매 순간이 새로운 만남인데도 가끔은 숙제하듯 걷고 있었던 것이다.

 

삶의 진실은 과정 속에 있는 것임에도 우리는 삶에서도 길 위에서도 목적지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는 것만이 승리이고 성공이라고 여기며 그렇게 주변을 돌아볼 여유조차 저당 잡힌 채로 허겁지겁 살아가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잘 사는 삶이란 사다리의 끝은 먼저 밟는다거나, 모두가 탐내는 물건의 소유나 소장품의 화려한 목록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도 괜찮을 만큼의 세월을 살아왔건만, 그 사실을 체화(體化)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인생이 고달프면 걸으라

‘인생이 고달프면 걸으라’고 했다. 그것이 광활한 대지의 길이건, 인생길이건, 그냥 무심히 마음을 열고 걸으면 된다. 길은 언제나 걷는 자를 위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 무대에는 많은 꿈과 희망이 담겨 있고, 그만큼의 아픔과 슬픔도 녹아 있는 인생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서산의 붉은 해가 긴 그림자를 바다 위로 드리운다. 오늘의 여정도 머지않았나 보다. 바다를 건너는 수변데크 길 가장자리의 이정표는 만대항이 지척임을 알려준다. 노을이 번지는 만대항은 고요한 낯빛으로 여행자를 맞는다. 종착지의 운명은 떠난 사람을 보내야 하는 자리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만대항에는 걸어온 길을 되짚어 떠나는 여행자들과,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친 몸을 쉬느라 기척도 없는 배들만이 바다에 고요히 엎드린 채로 다가올 어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수한 오늘이 가라앉은 길 위에서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선비를 다시 생각하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싶어라

길은 거연정(居然亭)에서 시작된다. 계곡을 향해 걸음을 내딛으면, 이내 그림 같은 풍경 속의 천연 암반 위에 정자 하나가 날개를 활짝 편 채 도약을 준비하는 학처럼 날아갈 듯 가리하고 있다. 계곡을 가로지른 무지개 다리인 화림교를 건너면, 그곳에 거연정이 있다.

 

거연정은 이름 그대로 ‘자연(然)과 더불어 살고(居)’ 싶은 뭇 사람들의 바람이 담겨있는 정자다. 그래서인지 “자연에 내가 거(居)하고, 내가 자연에 거하니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세상일을 잊게 하는 곳”이라는 설명조차도 그럴듯해 보인다. 거연정이란 이름은 ‘한가로이 내와 자연(개천과 돌)을 즐기다’ 라는 뜻을 주자의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이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선비를 생각하다

거연정을 돌아 나오면, 선비문화 탐방로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길가에 자리한 탐방로 안내도에는 온통 정자 이름뿐이다. 거연정, 동호정, 군자정, 영귀정, 경모정, 람천정, 농월정, 구로정…. 선비문화라는 것이 정자에서 노닐던 풍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정자문화 탐방로’가 맞을 듯싶다.

 

사실 선비는 조선시대에 학문(유학)을 닦던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선비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사용되던 시점으로는 세종 때 지어진 용비어천가에서 발견된 ‘션븨’이라는 단어를 그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일부는 선배(先輩)에서 선비의 어원을 찾기도 한다. 어떤 의미로든 선비는 유학을 공부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개념으로, 특히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숭상하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다가 선비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16세기로, 이때 우리 역사에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장착한 지식인 집단이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는데, 이들이 사림(士林)이다. 이들 사림이 등장한 이후 선비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에 이른다.

 

삶이란 유랑과 회귀의 반복

비를 맞으며 길을 걸을 때면, 어쩌면 길이라는 대상보다는 자신에게 더 집중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쩌면 길도, 여행자도 비에 젖어 차분히 가라앉은 탓일 게다. 그래서 삶이 ‘유랑과 회귀의 반복’ 이라면 우중산책의 여정에서는 왠지 ‘유랑’에 방점을 찍히고 만다. 그러니 유랑하는 스스로는 왠지 더 처연해지기 마련이고, 마음도 덩달아 조금은 더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일까. 빗속을 걸을 때면 자기 자신에게 조금을 더 너그러워지곤 한다.

 

개울가의 느닷없는 장소에 잎사귀가 무성한 아름드리 나무가 빗줄기에 떨고 있다. 이런, 뽕나무다. 바닥에는 제풀에 겨워 떨어진 오디들이 지천이다. 그야말로 자연산 그대로의 유기농 오디들이 행인들의 무심한 발길에 채이고 뭉개지고 있었다. 멀쩡하게 생긴 놈 하나를 주워 얼른 입에 넣었더니 달다.

 

먹을 것이 귀하던 70년대의 시골에서 오디는 어린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먹거리였다. 그래서 초여름이면 오디를 따러 다니는 게 일 중에서도 큰일이자 즐거움이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뽕밭을 찾아 타고 넘은 산이 몇 개였던지. 그러다가 오디가 풍성한 뽕밭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해지는 줄도 모르고 오디를 따 먹고, 주전자를 채우기 바빴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추억의 오디가 땅바닥에서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저 홀로 뭉개져가고 있었다. 새삼 세월의 무상함과 세월의 변화가 가져온 오디에 대한 무관심이 아쉽고 서운하다. 하지만 어쩌랴.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렸는데 오디쯤이야 뭔 대수겠는가.

 

달을 희롱하다

길은 계곡과 들을 옹가며 오솔길로 끝없이 이어진다. 길이 계곡의 하류를 향해 뻗어 있는지라, 중간중간 만나는 계곡의 폭도 그만큼 넓어진다. 하류로 내려올수록 가히 개천이라 부를 만하다. 너른 암반 위에 또 하나의 정자가 서 있으니, 농월정(弄月亭)이다.

 

‘달을 희롱하는 정자’ 라…. 이름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계곡의 규모나 아름다움이 가히 화림동계곡의 대표 정자로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농월정(弄月亭)이라는 이름은 이태백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저 달을 희롱한다는 뜻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글자 농(弄)자의 모습이 옥(玉)을 두 손으로 떠받드는 모양이라 이에 착안해 달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니 이태백의 혜안이 새삼 놀랍기만 하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더 이상의 여정은 무리일 듯싶다. 한편으로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의 여정이 선비문화 탐방로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아쉬움은 덜하다. 돌아보는 농월정이 빗속에서 아득하다. 고향 땅이 내게 전해주는 선물이 아닐까 싶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