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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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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날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참혹한 실상 은미희 장편소설
은미희 지음 | 집사재 | 2021년 08월 | 324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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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 지음/집사재/2021년 08월/324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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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우리가 몰랐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참혹한 실상

 

『나비, 날다』는 일본 제국에서 식민지 조선 처녀들을 거짓 꾀임과 강제로 공출하여 위안부로 살게 했던 참담한 기록이다. 『Flutter, Flutter, Butterfly』라는 표제로 미국에서 영문판으로 먼저 출판되었다.

 

이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사실을 알리고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 작가 자신의 견해는 최대한 배제했다 . 생존하는 할머니들의 증언을 소설의 형식과 구성을 빌어 엮어낸, 사실의 기록이며 또 다른 증언인 셈이다. 거대한 폭력 앞에 한 소녀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고, 국가가 보호해 주지 못하는 소녀의 삶은 얼마나 피폐해지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생각에서 작가는 집필을 시작했다고 한다.

 

■ 저자 은미희

광주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예창작과에서 석사를 받았으며 동신대학교 한국어교원학과 박사과정 중이다. ‘전남매일’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96년 단편‘누에는 고치 속에서 무슨 꿈을 꾸는가’로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1999년 단편 ‘다시 나는 새’로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 장편소설 ‘비둘기집 사람들’로 삼성문학상을 수상했다. 성실한 취재를 바탕으로 현대판 남사당패라 할 만한 떠돌이 엿장수 공연단의 애환을 그려 낸 ‘바람의 노래’를 발표했을 때는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예사롭지 않은 솜씨로 언론의 시선을 모았다. 그의 여러 단편들을 모아 엮은 첫 단편소설집 ‘만두 빚는 여자’는 쓸쓸한 일상을 붙잡고 삶을 이어 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통해 삶의 숭고함을 토로해 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작품으로 단편소설집 ‘만두 빚는 여자’가 있고, 장편소설로는 ‘비둘기집 사람들’, ‘소수의 사랑’, ‘바람의 노래’, ‘18세, 첫경험’, ‘바람남자 나무여자’등이 있으며, 청소년평전으로 ‘조선의 천재 화가 장승업’, ‘창조와 파괴의 여신 카미유 클로델’등이 있다.

 

■ 차례

작가의 말

 

프롤로그

1 나비야 나비야

2 두 명의 남자

3 그늘로 숨다

4 또 하나의 어둠

5 트럭에 태워지다

6 이별

7 붉은 벽돌 건물

8 경찰서 안

9 기차로 갈아타다

10 군수품, 혹은 간이매점보급품

11 아이의 죽음

12 사라진 미래

13 새로운 일

14 3호실

15 또다시 나비를 만나다

16 머리를 자르다

17 비루한 생

18 위안소, 구락부, 오락소

19 죽음을 꿈꾸다

20 짐승의 시간들

21 분절된 생

22 불모의 몸

23 은밀한 모의

24 확대되는 전선

25 별의 전설

26 삿쿠, 건빵, 그리고 블라우스

27 다시 탈출을 모의하다

28 금옥이

29 다시 잡히다

30 다시 위안소로

31 선택

32 사라진 봉녀

33 봉녀의 실종

34 봉녀

35 복수를 꿈꾸다

36 조센삐

37 금옥이 아프다

38 금옥을 보내다

39 또다시 시작된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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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 지음/집사재/2021년 08월/324쪽/15,000원


나비야 나비야

사뿐히 날아오르는 하얀 물체가 순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꽃잎인 듯 환영인 듯 하얀 물체는 어느 한 곳에 차분히 앉지를 못하고 오르내리며 그렇게 가볍게, 가볍게 바람을 따라 떠다녔다. 나비인가? 벌써? 바람결에 아직 칼날 같은 추위가 남아 있는데, 벌써 나비라니.

 

순분의 시선이 그 희디흰 물체를 좆았다.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나비였다. 나비는 날개를 팔랑이며 바람을 타기도하고 버리기도 하며 춤을 추었다. 바람이 날개를 가만두지 않는 듯, 날개에 앉은 환한 봄 햇살이 간지러운 듯, 나비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아직 꽃샘추위도 가시지 않았는데 뭐가 그리 급해 벌써 나왔을까. 나비는 날개를 팔랑거리며 어디 한 곳에 진득이 앉지를 못했다. 죽음을 담보로 얻은 저 날개가 자꾸만 날아오르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와. 널 잡아서 우리 엄마에게 보여 줘야겠다. 순분은 팔을 뻗어 나비를 잡았다. 하지만 순순히 잡힐 나비가 아니었다. 나비는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용케 순분의 손길을 피해 저만치 날아갔다. 꼭 그만큼. 꼭 두어 발자국 앞에서 그렇게,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나비는 순분을 이끌고, 약을 올렸다. 차라리 멀리 날아 가버렸으면 아쉬운 마음으로 포기했을 텐데, 나비는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한 채 순분을 유혹했다.

 

순분은 그 나비가 밉지 않았다. 아니, 바람을 타는 그 환하고도 미끈한 날개가 부러웠다. 저 날개가 있으면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터였다. 

 

두 명의 남자

나비가 날아가는 방향에서 남자 둘이 다가왔다. 갈색 바탕에 풀색 물이 연하게 섞인 군복차림의 남자와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초로의 남자였다. 둘 다 키가 작았다. 군인의 허리에서 길게 내려오는 칼이 섬뜩했다. 순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남자들의 목표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순분은 무언가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몸을 돌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봐, 이봐!”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순분을 불렀다. 순분은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야! 너! 거기 서!”

 

그들이 부를 때마다 순분은 발을 더 재게 놀렸다. 하지만 그들의 보폭과 걸음걸이는 순분보다 넓었고 빨랐다. 점점 그들과의 간격이 좁혀들었다. 도망쳐야 했다. 저들의 시야에서 사라져야 했고, 숨어야 했다. 저들에게 잡히면 큰일이었다. 마을에 퍼져 있는 온갖 흉흉한 소문들을 순분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그 소문 속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다.

 

저들의 포충망에 걸려드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처녀 공출.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을 위문단으로 꾸려 머나먼 곳으로 보낸다는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들보다 무서웠고, 두렵게 만들었다. 십대의 아이들, 그 소도 같은 신성함을 몸 안에 지니고 있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무얼 할까. 나이가 차지 않으면 몸무게를 달아 편입시키고, 내놓지 않으면 집안을 뒤져서라도 끌고 간다고 했다. 저들에게 식민지 처녀들은 쌀이나 소금이나 면화같은 무정물의 산물이나 다름없었다.

 

순분은 길 아래 비탈로 뛰어내렸다. 그 비탈 중간쯤에 사람하나 숨어들 만한 작은 구멍이 있다는 걸 순분은 알았다. 어른 몸피는 어림없지만 순분 같은 작은 몸집이면 충분히 숨어들 수 있는 비밀한 구멍이었다. 거기 들어가 웅크리고 있으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람들은 그 구멍의 존재조차 몰랐다.

 

“어디 갔지?”

 

“분명 이리로 왔는데. 쥐새끼 같은 년.”

 

순분은 가슴이 떨렸다. 언제고 불시에 놈들의 얼굴이 구멍 속으로 쑥 들어올 것만 같았다. 쿵쿵쿵쿵. 심장박동 소리가 제 귀에까지 들리는 듯 했다.

 

“요사스런 계집 같으니라고.”

 

화가 난 듯 군인이 한발로 땅을 차며 말했다.

 

“그냥 가시지요. 누구 집 딸인지 알고 있으니 내일이라도 그 집에 가서 잡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얼마나 지났을까. 순분을 찾지 못한 그들은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순분은 여전히 몸을 숨긴 채 숨을 참고 있었다.

 

헌데 나비는, 나비는 어디 있을까? 순분은 구멍 안에서 애벌레처럼 몸을 구부린 채 눈으로 나비를 찾았다. 분명 조금 전에 나비는 나를 따라왔었다. 헌데 어디로 갔을까? 나비야 나비야, 너는 지금 어디 있니? 

 

트럭에 태워지다

온통 세상이 깜깜했다. 정수리 위에서 눈부시게 쏟아지는 그 환한 빛살들이 모두 어둠이었다. 순분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얼마동안 그러고 서 있었을까, 암순응에 이어, 손차양을 만들어 햇빛을 가리고 가느스름하게 눈을 떴을 때 두 남자가 순분을 보고 웃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순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며 물었다. 한 사람은 연한 풀물색이 도는 황갈색 군복차림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마을이장이었다.

 

“잡았다, 요년. 쥐새끼처럼 숨는다고 못 찾을 줄 알았나?”

 

독기를 품은 군인의 음성에서 쇳소리가 느껴졌다. 순분은 두렵다 못해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너! 돈 벌고 싶지 않아?”

 

조금 전까지 순분을 위협하고 닦아세우던 사박스러움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말투에 은근함까지 깃들어 있었다. 돈이라니요? 순분은 눈으로 물었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다. 어떤가? 돈을 벌텐가?”

 

그 부드러운 음성이 순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순분은 돈이 벌고 싶었다. 돈을 벌면 할 일이 많았다. 순분은 자신이 돈을 벌면 가장 먼저 아버지에게 땅을 사드리고 싶었다. 평생을 땅에 다붙어 살아온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당신의 이름으로 된 땅을 사서 갈게 하고, 거기에 뼈를 묻게 해드리고 싶었다. 마름으로 살아온 아버지에게 자존감을 찾아주고, 진정한 수확의 기쁨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비행기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하셨어요? 정말 돈을 주나요?”

 

“그렇다니까. 힘든 일도 아니지. 생각해 봐. 네 손으로 멋진 비행기를 만든다는 거. 재밌지 않겠니? 게다가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학교도 다닐 수 있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할 수도 있지. 그건 네가 할 요량에 따라 달라져. 어때? 가지 않으련?”

 

“오늘 저녁에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내일 떠나겠어요. 헌데 아버지는 반대하실 수도 있어요.”

 

순분은 마치 다 큰 어른처럼 너볏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그럴 시간 없어. 지금 당장 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네 자리를 차지해 버릴 거야.”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는 보고 가야겠어요.”

 

“좋은 말로 하니 안 되겠군. 요시!”

 

순간의 돌변에 순분은 사태를 직감했다.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고 울렁거렸다. 이건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게야. 하지만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 볼 사이도 없이 순분은 토끼몰이 당하듯 이장의 손에 떠밀려 집 밖에 세워져 있던 트럭 짐칸으로 내몰렸다. 가지 않겠다고, 싫다고 그러니 제발 놓아달라고 버티었지만 두 명의 남자를 이겨낼 수 없었다. 그들은 막무가내였고 위협적이었다.

 

순분은 짚단 던져지듯, 그렇게 하나의 더미로 트럭 짐칸에 태워졌다. 짐칸에서 뒤를 돌아볼 때 집은 늙고 허약한 짐승처럼 그렇게 힘없이 엎디어 있었다. 그 지붕 위로 오후의 햇빛이 나른하게 내려와 있었고, 그 햇빛을 이불처럼 덮고 있는 낡고 작은 집은 조는 듯 땅에 다붙어 있었다. 작년 늦가을 새롭게 인 초가지붕이 그 햇빛에 푸근해 보였다. 봄볕이 눈 시리게 밝았다. 

 

군수품, 혹은 간이매점보급품

아이들과 순분이 내린 곳은 부산이었다. 순분에게는 바다는 처음이었고, 바다가 처음인 만큼 부산도 처음이었다. 처음인 것이 어디 바다와 부산뿐이던가. 기차도 처음이었고 트럭도 처음이었고 경찰서도 처음이었다. 처음이라는 그 첫 경험에 들어 있는 다양한 감정들, 이를테면 설렘이거나 두려움이거나 흥분이거나 호기심 같은 것들. 그것들은 살갗을 간지럽게 만들고 터럭들을 곤두서게 만들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지만, 순분은 그 같은 감정보다는 우선 처음이라 두려웠고 처음이라 무서웠고 처음이라 불안했다.

 

“빨리 빨리 움직인다. 이 게으른 것들. 움직이는 것 좀 봐라.”

 

여지없이 군인의 욕설이 날아왔다. 한 무리로 서성이는 아이들을 보고 일본인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어떤 이들은 마치 오물이라도 보는 듯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순분은 앞서가는 아이의 뒤를 따르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돈을 벌어 와서 아버지에게 땅을 사드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그때였다. 한 아이가 두 발을 짱짱히 딛고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군인 두 명이 아이의 팔 하나씩을 잡고 끌었지만 아이는 완강히 버텼다.

 

“안 갈래요. 집에 갈래요. 보내주세요.”

 

아이의 울음이 부두를 울렸다. 아이는 힘껏 버텼지만 그들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이는 질질 끌려갔다. 제발 보내주세요. 제발요... 아이의 발에서 고무신이 벗겨지고 버선이 벗겨지고 종내는 주저앉아 엉덩이로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버지의 약을 사러 갔다가 잡혀왔다는 아이였다. 오빠가 강제 징용되고 아픈 아버지를 수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말하던 아이였다. 저들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아이는 막무가내로 버둥거렸다. 그 바람에 아이의 치마가 찢겨지고 아이의 옷고름이 찢어지고 저고리가 벗겨졌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이년이 좋은 말로 하니까, 요시. 갈 수 있다면 가봐라. 더 이상 네년을 잡지 않을 테니까. 가! 가란 말이닷!”

 

그 아이를 강제로 끌고 가던 군인들 중 한 명이 아이의 머리채를 쥐어 잡더니 그대로 질질 끌고 부둣가로 갔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끌려갔다. 그것도 잠시. 이내 아이의 모습이 부두에서 사라져버렸다. 아이를 부둣가로 끌고 간 군인은 보란 듯 아이를 바다로 밀쳐버린 것이다.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봤지? 누구든 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말하라! 그러면 보내주겠다.” 

 

새로운 일

철컥. 드디어 화물칸 문이 열렸다. 순분은 그 소리가 또 하나의 세상이 열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서로의 손을 잡았다. 찜통 같은 열기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두려움과 긴장으로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그러니 살고 싶으면 말을 잘 들어라!”

 

허리춤에 찬 칼은 그가 걸을 때마다 걸리적거렸다. 그는 화물칸의 벽을 지휘봉으로 탕탕 치며 아이들을 독려하고 채근했다. 그 소리가 사박스럽고도 위협적이었다.

 

“이 곳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이곳은 전장이다. 대 일본제국이 꿈꾸는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성전에 참여하게 됨을 감사하게 여겨라! 이제부터 너희는 성전에 임하는 한 명의 전사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너희들 임무를 완수하라!”

 

성전이라니? 전사라니? 아이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에게 물었다.

 

“비행기는? 비행기는 어디서 만드나요?”

 

순분은 그의 눈치를 보며 자신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말하면서도 무서웠다. 순분의 물음에 그가 다가왔다.

 

“비행기라...”

 

군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비행기를 만드는 일보다 더 큰일이고, 더 보람 있는 일이고, 더 쉬운 일이다. 그러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죽음. 그들이 말하는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죽음은 어디서든 흔했다. 인생에 한 번 맞이하는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하긴 죽음이 흔한 게 어디 여기뿐이던가. 고향에 있을 때도 죽음은 흔했다. 여기저기서 부음이 날아들었고 곡소리가 바람에 꽃잎처럼 나부꼈다. 일경의 고문과 칼에 참혹하게 죽어나간 이들이 풍문으로 죽음을 알려왔고, 누군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다시 부고로 소식을 전해왔다.

 

헌데 그 죽음이 코앞에 있었다. 순분의 눈앞에. 아이들의 코앞에. 여차하면 저들은 금방이라도 칼을 내리칠 기세로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겁을 주고 있었다.

 

저들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다시 나비를 만나다

순분은 조금 전 위생소에서 받아온 작은 봉투를 꺼내 풀어보았다. 그 안에 든 물건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알 수 없었다. 삿꾸. 작은 고무주머니 모양의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휘장이 걷히면서 누군가가 불쑥 방으로 들어왔다. 허리에 긴 칼을 차고, 어깨에 누런 견장을 단 일본군 장교였다.

 

소변이 마려운 사람처럼 바지단추를 푸는 그의 손길이 급하고도 바빴다. 바지를 벗고 윗옷마저 벗은 그가 알몸으로 순분에게 달려들었다. 순분은 기겁해 뒤로 물러났다.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이곳으로 오는 동안의 악몽 같은 시간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순분은 애원했다. 배 안에서 불려나갈 때마다 치러야 했던 그 참담한 기억들에 순분은 몸서리를 치며 두 손을 모아 빌며 뒤로 물러났다. 그 시간들이 끝난 게 아니었다. 그제야 처녀공출이 갖는 의미와 은밀히 떠돌던 위안부의 정체를 순분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들이 위안부였다. 군인들을 위안하는 여자들. 위안의 정체가 그들을 몸으로 받는 것이었다. 그 사실에 순분은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순분을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부욱, 솔기가 뜯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대로 맨살이 드러났다. 순분은 양팔을 엇질러 겨드랑이에 찔러 넣고 저항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고, 한창때인 남자의 완력을 당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순분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발로 찼다.

 

“위대한 제국의 장교를 위안할 줄 모르는 조센징은 죽여도 된다. 위대한 성전에 목숨 바치는 일본제국의 장교를 위해 충성을 다해도 시원찮을 판에 감히 반항을 해? 네년이 오늘 첫날인 점을 봐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어떻게 할 테냐! 내 말을 들을 테냐. 아니면 고집을 부릴 테냐! 선택하라. 내 말을 안 들을 때는 네년의 간을 꺼내먹겠다.”

 

순분은 대답 대신 놈을 쏘아보았다. 그 순간 칼날이 몸을 스치는 듯했다. 허공을 가르는 칼의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모든 것은 찰나였고, 순간이었다.

 

눈을 떠보니 어깨 쪽에서 피가 배어나 옷을 적셨다. 순분의 결기가 그 열린 살 틈으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아래로부터 온몸을 찢는 통증이 밀려왔다. 어깨에 난 자상과는 또 다른 통증이었다. 봉녀의 방에서도 그녀의 비명이 들여왔다. 이어 또 다른 옆방에서도 비명들이 날아왔다. 금옥의 방에서도, 또 다른 방에서도, 비명은 연이어 날아왔다. 판자로 대충 칸을 만든 벽이 우당탕 흔들렸다. 악! 아이들의 비명을 듣다 순분은 정신을 잃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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