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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눈물은 닦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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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청

흐르는 눈물은 닦지 마라

내 청춘의 고백과 장례와 같은 글
조연희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09월 | 256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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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희 지음/쌤앤파커스/2021년 9월/256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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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우리들의 젖은 눈물이 다 마르지 않는 한,

지나간 시간은 아직 지나간 것이 아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1970-90년대. 서울 산동네 서민 아파트에서 한 여성 시인이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을 보내며 느꼈던 절절한 응시의 기록.

 

그 시절엔 독재가 있었고 최루탄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막걸리가 있었고 버릴 수 없는 청춘과 사랑이 있었다. 시인은 독재와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를 겪은 삶을 시와 산문으로 풀어내었다.

 

■ 저자 조연희

서울에서 태어나 추계예술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사각뒤주의 추억’ 외 4편이 『시산맥 신인상』에 당선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 산문집은 386 세대인 시인이 암울했던 독재의 시대를 살면서 ‘삶의 고뇌’에 대한 철저한 응시의 기록이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정녕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한 질문을 던져준다.

 

■ 차례

제 1부 기억은 늘 한 모퉁이에서 배양된다

작가의 말

내 청춘은 근시였다

곽리자고는 왜 자살을 지켜만 봤을까

워킹푸어, 별이 되고 싶었던…

서럽게 붉은 노을

봄은 동백 꽃물 속에서 피고

거리 귀신

절망

행복한 숙주와 기생따개비

달리는 무덤

그러면 되겠습니까?

휘어지는 시간

 

제 2부 슬픈 칼 하나 품고 살았네

슬픈 칼

물렁함과 딱딱함의 변증법

천축이어

외로운 꼭짓점

쥐는 소보다 힘이 세다

찌그러진 사각형과 일그러진 힘

아무튼 인생이란

돌아갈 수 없는 집

눈물처럼 흐려지는 길을 따라

가난의 알고리즘

브레이크가 파열된 사륜구동차처럼

참나무

그리운 것들의 옆구리엔 삼각주가 있다

 

제 3부 내청춘은 반송된 편지였다

큰 소가 굴레를 벗어놓은 곳

제발, 꽃피지 마라

염증

마돈나와 처녀막

위가 4개 였으면 좋겠어

사랑은 독이 든 사과다

선인장

위선과 위악

자음과 모음의 미로

저당 잡힌 청춘

별은 흔들리면서 반짝인다

 

제 4부 내 첫사랑은 비포장도로였다

드라큘라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

나뭇가지는 새의 무게만큼 휘어진다

모든 남자는 원래 여자였다

동상이몽의 이불을 덮고

변절

머리를 밀다

인어공주와 사이렌

이력서

나는 외로운 정전기였다

내 안에 남자가 하나 생겼다

검은 양복을 빌려 드립니다

 

에필로그

막다른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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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희 지음/쌤앤파커스/2021년 9월/256쪽/15,000원

 

기억은 늘 한 모퉁이에서 배양된다

워킹푸어, 별이 되고 싶었던…

우리가 왜 동숭 시민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월남전에 참전해 적은 돈이나마 마련한 아버지가 서울살이를 시작하며 시민아파트를 선택한 듯하다.

 

아무튼 내 기억은 그 동숭 시민아파트에서 길을 잃은 것으로 시작된다. 3,4살쯤 되었을까. 호기심에 아장아장 나서긴 했지만, 아니 기어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보니 긴 회랑 같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직사각형의 대문들이 일렬횡대로 죽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공포심 비슷한 것이 몰려왔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 획일적인 문들이 무서웠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무서웠다. 내가 유독 ‘길치’인 이유가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은 아닐까. 그때부터 난 길을 잃을 운명이었던가 보다.

 

그 동네는 거대한 미로였다. 시민아파트에서 비탈진 가풀막을 오르면 낙산이 나왔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수도로 정한 후 1396년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한양도성을 축조했는데 산등성을 따라 이어지는 성 자락은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이 낙산 옹벽을 기준으로 창신동과 동숭동이 나뉘었다.

 

사람 하나 간신히 걸을 수 있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꼬불꼬불한 골목이 끝없이 이어졌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 비슷한 또 다른 골목이 이어졌다. 같은 형태의 골목이었지만 어찌 보면 너무나 다른, 이상한 골목들이었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길을 잃을 즈음 고개를 들면 능선 위에 솟아 있는 성벽이 보였다.

 

내가 골목을 헤매는 동안 엄마는 종아리가 부어오르도록 미싱을 밟았다. 그러나 그녀가 온종일 미싱 위에서 발을 열심히 놀린 거나 내가 성자락과 창신동 골목을 늦도록 헤맨 거나 모두 제자리걸음이었다는 것을 당시엔 미처 몰랐다.

 

그러나 산동네여서 좋은 점도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서울대학 병원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빌딩들이 발아래 목업처럼 펼쳐졌다. 특히 밤이면 도시의 불빛이 크리스마스트리나 밤바다에 떠 있는 집어등처럼 반짝였다. 그 불빛은 무척이나 설레는 것이었다.

 

이곳에 사는 아이들의 꿈은 어서 산꼭대기를 내려가 저 도시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음악이 흐르고 먹거리도 풍성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저 산 아래. 직장과 학교가 있는 저 산 아래. 조명이든 헤드라이트든 상관없었다. 산 아래서 반짝이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별이었다.

 

휘어지는 시간

수업이 파할 때쯤 엄마가 교문을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유서사건이 있은 후 엄마가 담임 선생님에게 호출당한 모양이었다. 멀리서도 난 엄마를 한눈에 알아봤다. 몸빼바지에 예의 그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왔기 때문이다. 원색에 가까운 파란색 슬리퍼는 엄마 몸에서 별개의 생명체처럼 분리돼 저 혼자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엄마는 보이지 않고 슬리퍼만 눈에 들어왔다. 마치 슬리퍼가 주인인 양 엄마를 끌고 온 것 같았다.

 

사실 엄마는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 한 켤레로 사계절을 버텼다. 겨울에도 양말 위에 솜버선을 신은 후 슬리퍼를 신었다. 밥을 지을 때도 시장에 갈 때도 슬리퍼는 굳은살처럼 늘 엄마 발바닥에 박혀 있었다. 닳거나 찢어졌다면 벌써 새 신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는 징글징글하게 질겼다. 헤지지 않는다는 것이 때론 사람을 얼마나 질리게 하는지, 마모된다는 것은 양보가 아니던가.

 

나는 교무실 신발장에 놓인 엄마의 슬리퍼를 보면서 갑자기 엄마에게 새 신발을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신발은 각자 주인을 닮았다. 앞이 뭉툭한 구두는 너털웃음을 잘 웃는 미술선생님을 닮았고, 굽이 뾰족한 하이힐은 눈매가 유난히 날카로운 사회 선생님을 닮았다. 삐딱하게 닳은 뒷굽과 벗겨진 구두코마저도 각자 주인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엄마의 슬리퍼는 초라했지만 뻔뻔했고 완강하면서도 흠집투성이였다.

 

자세히 보니 먼지 탓인가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도 조금 지쳐 보였다. 엄마가 신고 있을 때는 파랗게 독이 오른 것처럼 생기가 돌았는데 조금 풀이 죽은 것도 같았다. 슬리퍼도 좀 쉬고 싶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교무실에서 나온 엄마는 마치 쿠마에의 무녀처럼 더 작고 더 초라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눈 밑의 주름도 조금 더 깊어진 듯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도 묵묵히 뒤를 따랐다. 그저 가뭄 든 논처럼 갈라진 엄마의 발뒤꿈치를 보며 걸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엄마가 재래시장 쪽으로 가고 있었다. 시장은 낮에도 알전구를 켜놓았는데 길게 늘어진 전선이 흔들릴 때마다 노란빛이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엄마는 노점에서 고등어 한 토막을 사고는 동태며 다른 생선들의 내장을 서비스로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신발가게로 향했다. 부윰한 먼지가 날리고 있는 가운데 외짝씩 놓여 있는 신발들이 마치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다며 극구 말렸지만, 엄마는 주인아저씨가 권해주는 요즘 학생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하얀색 운동화를 사주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엄마 몸빼바지 속 또 하나의 주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이 그 비밀주머니에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 잠깐만 발 들어봐.”

“왜?”

“그냥 조금만 들어봐.”

 

엄마가 발을 들자 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새로 산 내 하얀 운동화를 신겼다. 그리고 엄마의 슬리퍼를 내가 신었다. 한동안 엄마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와 난 서로 기댄 채 걸었다. 슬리퍼가 헐거워 자꾸 벗겨졌지만, 엄마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내 발을 지탱해주었다. 

 

슬픈 칼 하나 품고 살았네

아무튼 인생이란

입대한 오빠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엄마와 난 배추김치를 쭉쭉 찢어먹다 왈칵 목이 메었고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만 봐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신발장에서 오빠의 철 지난 신발을 발견하거나 고스란히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장롱에서 곰팡내를 풍길 때, 엄마와 난 다시 한 번 오빠의 빈자리를 더듬거려야 했다. 그래도 우린 살아야 했으므로 난 간판도 없는 구멍가게에서 막걸리를 샀고, 언니는 나팔꽃이 무단으로 기둥을 점거한 야매 미장원에서 나팔꽃 넝쿨처럼 돌돌 말린 파마를 했다.

 

엄마가 나름 찾은 일이 위탁모였다. 대부분 미혼모의 아기들이었다. 부모가 이혼해서 온 아기. 심한 경우 미성년의 아기도 있었다. 임신 막달까지 배를 꽁꽁 싸매고 있다가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 할 만큼 체중 미달로 나온 아기도 있었다.

 

엄마가 처음 위탁받은 아기는 사내애였다. 대학생인 아기의 엄마가 어떻게든 아기를 키워보려 했지만 결국 복지회에 맡겼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생모에 관한 정보는 금기 사항이어서 사실 확인이 힘들었다. 다만 아기가 뽀얗고 귀티가 나는 게 아마도 생모의 손길을 탔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아기의 출현은 오빠의 부재로 우물 속 같던 집안 공기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이제 막 뒤집기를 시작했으며 배를 밀고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모습에 우리 식구는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보드라운 속살과 달달한 분유 냄새. 딸랑이만 흔들어도 까르르 웃는 아기 생각에 하굣길에 쪼르륵 달려올 정도였다.

 

엄마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들통에 젖병을 일렬로 세워 펄펄 끓는 물에 매일 소독했고, 하얀 기저귀를 삶아 공터 햇빛 바른 곳에 말렸다. 그 하얀 기저귀가 국숫발처럼 길게 늘어져 흔들릴 때면 햇빛이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엄마는 흰 쌀을 갈아 푹푹 끓였다. 그 걸쭉한 미음을 체에 쳐 맑게 걸러낸 다음 분유를 타서 한 번 더 끓이고 난 뒤 아기에게 먹였다. 유독 엄마가 키운 아기가 토실토실한 것은 그 미음 덕분이 아니었을까.

 

‘홀트아동복지회’에서는 나름의 지침이 있었고 탁아교육도 철저히 했다. 하지만 엄마는 시간 맞춰 우유를 주라는 말도 무시하고 아기가 울면 젖병부터 입에 물렸다. 엄마는 정말 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가장 괄목한 만한 변화는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꼬박꼬박 집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오래 머물진 않았다. 아버진 비탈길도 늘 뛰어서 오르내렸고 식사도 규칙적인 속도전일만큼 성격이 급했으니까.

 

그런 아버지가 집에 들어와 저녁 식사를 하고 한두 시간 아기와 함께 보낸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였다. 아기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표현은 끝없이 뭔가 먹을 걸 준다는 점이었다. “이눔 봐라” 하면서 배부른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고 남은 이유식을 먹였다. 아기가 받아 먹는 모습이 뭐가 그리 우습다고, 혼자 너털웃음을 웃기도 했다. 아버지는 엄마의 쿠사리를 들으면서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우리에게도 계속 “이눔 봐라,” 하면서 아기에게 뭔가를 먹였다.

돌아갈 수 없는 집

그러나 아기와 헤어질 시간은 기어이 다가오고 말았다. 해외입양이 정해졌던 것이다. 양부모는 옆구리가 흘러넘치는 햄버거 같은 고도비만의 노란 머리 여자와 남자였는데, 웃는 얼굴이 그리 나쁜 사람들 같아 보이진 않았다. 자신들의 아이인 듯한 사내애가 염소에게 당근을 주는 모습, 마당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는 모습 등의 사진도 함께 있었다. 시민아파트 그것도 지하와 같은 1층에 살고 있던 우리에게 푸른 잔디 위의 하얀 집은 꽤 여유로워 보였다. 노심초사하던 엄마도 사진을 보고는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다.

 

위탁모를 하다 보면 간혹 아이가 커가는 모습의 사진들과 함께 편지를 보내오는 양부모도 있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외국어 편지를 나에게 읽어달라고 했는데 필기체로 갈겨쓴 암호를 어찌 다 해독할 것인가.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읽는 척하다가 “잘 지내고 있고 엄마에게 고맙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잠시 엄마의 이마 주름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엄마가 있는 것 같다. 생모, 위탁모, 양모. 그중에서 위탁모는 죄를 가장 많이 지은 사람에게 맡겨지는 악역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두 번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생이별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집이 있다.

다시는 꺼내면 안 되는 고백이 있다

쓴 커피 같은 어둠이 엎질러진 방에

가지런한 것은 지난 겨울을 차곡차곡 개어놓은 이부자리

다시는 펼치면 안 되는 계절이 있어

돌아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웃자란 길과

더는 새살이 돋지 않는 나무

담을 덮어버린 숲

앞으로 가던 바람이 뒤돌아본 울타리

병든 강아지 한 마리 굳어가는 다리를 핥고 있다.
-졸시 ‘귀가’ 전문

 

가장 슬픈 일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면서도, 자신이 왜 떠나는지조차 모르는 일일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귀가할 곳이 없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내청춘은 반송된 편지였다

큰 소가 굴레를 벗어놓은 곳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전기대 낙방이 전화위복이 되어 원하던 문예창작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게시판 가득 빽빽하게 합격자의 수험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멀리서도 나는 내 이름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이름 주변에서 이상하게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이 그렇게 크게 빛나 보인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이내 실망감으로 바꿨다.

 

학교는 ‘굴레방다리’에서도 북아현동 방향으로 한참이나 더 들어간 곳이었다. ‘굴레방다리’라는 지명은 ‘큰 소가 길마는 무악에, 굴레는 이곳에 벗어놓고, 서강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와우산에 가서 누웠다’라는 풍수지리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소가 굴레를 벗어놓은 곳이라서 그럴까. 대학가라기보다는 소가 벗어놓은 굴레를 뒤집어쓴 것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왕래하는 듯했다. 아현시장과 공덕시장 등 재래시장이 자리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수분이 빠져 쪼글쪼글해진 귤이나 가지 오이 등을 좌판에 쌓아놓고 파는 할머니나, 빗자루 수세미 등 생활 잡화들을 가득 실은 리어카들이 즐비한 곳. 심지어 아현 고가도로 밑에는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밤에만 불을 밝히는 개미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별은 흔들리면서 반짝인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언니가 운영하는 대학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언니 말로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밤마실을 갔다 우연히 카페를 하는 후배를 만났는데, 돈은 버는 대로 조금씩 줘도 되니 맡아달라고 통사정을 해 엉겁결에 ‘시사랑’을 인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5평쯤 될까. 테이블이 고작 4개인 조그만 찻집이었다. 커피는 기본이고 간단한 식사와 안주도 제공되는, 요즘 카페와는 다르게 찻집과 호프집을 넘나드는 그런 공간이었다. 상호가 ‘시사랑’이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복선처럼 느껴진다. 당시 시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난 영원히 시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까.

 

날이 어둑해지면 ‘시사랑’의 어두운 조명 아래 바퀴벌레처럼 그들이 모여들었다. 그날은 초저녁부터 빌딩 유리창, 풀빵 장수, 대학생, 막노동꾼이 술판을 벌였고, 옆 테이블에서는 이방인처럼 전혀 분위기가 다른 곱슬머리 중년 사내가 혼자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턴테이블에서 정태춘의 ‘북한강에서’가 흘러나왔지만,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빌딩 유리창이 목소리를 높이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꽤 많은 지폐를 꺼내더니 반으로 쭉 찢어 카페 바닥으로 내던졌다. 순간 카페가 조용해졌다.

 

“쓰고 싶으면 붙여서 써!”

 

그때였다. 언니가 벌떡 일어나 지폐를 찢어버린 빌딩 유리창의 멱살을 잡았다. 풀빵 장수가 빌딩 유리창을 뒤에서 껴안았고, 대학생이 언니를 말렸다. 막노동꾼이 카페 바닥에 흩어진 돈을 주웠다.

 

“경찰을 불러요!”

 

어이없는 이 상황에 어쩌자고 눈물이 쏟아지는 것인지. 엄마와 아버지의 몸싸움. 그동안 무수히 보아왔던 몸싸움들과는 또 다른 아픔이 엄습해왔다. 난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근 채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눈물을 닦고 밖으로 나오니 ‘시사랑’ 간판이 기력이 쇠한 노인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간판 등이 수명을 다한 모양이었다. 하늘을 보니 ‘시사랑’ 간판과는 대조적으로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별빛이 반짝이는 건 공기 입자의 떨림 때문이라던데. 그래서 바람이 심하게 불수록, 대기 입자가 심하게 흔들릴수록 별빛이 더욱 반짝인다던데.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나는 경찰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시사랑’ 카페로 들어갔다. 

 

내 첫사랑은 비포장도로였다

검은 양복을 빌려 드립니다

비탈길 위에 사는 여자는 웬만한 이별 따윈 비탈길 아래서 끝낸다.

 

혈관종에 걸린 종아리처럼 울퉁불퉁한 비탈길이 곧추서 있고, 벼랑이나 암벽 위에 집들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곳. 그중 가장 침침한 불빛이 새 나오는 곳이 우리 집이었다.

 

비탈은 일어서고 싶은 길.

아침에 내리막이었던 길이 저녁이면 다시 오르막이 되는 길이란 것을.

비탈길 위에 사는 여자는 웬만해선 자신의 비탈을 보여주지 않는다.

 

당시 나는 연애 중이었는데, 대부분의 커플이 그렇듯 내 남자친구도 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길 원했다. 하지만 나는 비탈길 밑의 이 골목 저 골목을 전전하다 남자친구를 돌려보내곤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비탈 입구에서 하이힐의 굽이 똑 부러져 버렸다. 남자친구는 돌멩이를 찾아 뒷굽을 박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비스듬히 서 있는 양복점이 눈에 들어왔다. 상반신만 있는 마네킹은 미완의 예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팍에 큼직하게 쓴 글씨를 매달고 있었다. ‘검은 양복을 빌려드립니다.’ 나도 이제 예복이 필요한 나이가 된 걸까?

 

그러나 예복에는 상복도 포함돼 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결혼이란 비로소 하나의 예복을 입는 일이고 나이를 먹는 것은 그 예복의 용도가 조금씩 변경되는 일이란 것을.

 

난 내 구두 굽을 고쳐 준 남자친구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왠지 이 남자와 결혼할 것 같은 예감이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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