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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없다고 매일 슬프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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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없다고 매일 슬프진 않아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란 통역사의 성장 에세이
박정은 지음 | 서사원 | 2021년 08월 | 224쪽 | 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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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 지음/서사원/2021년 8월/224쪽/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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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집

 

■ 책 소개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란 모든 사람과, 솔로 육아를 하는 어른들에게 전하는

가슴 먹먹한 용기와 위로의 글

 

저자는 유년 시절은 한국에서, 청소년기는 카자흐스탄에서 보냈다. 카자흐스탄은 두 가구 중 한 가구가 이혼 가정일 만큼 이혼율이 높다. 한국에서는 숨기기 바빴던 가정사가 그곳에서는 흔한 일이 되니 너무도 편한 일상이었다고 회고한다.

 

한 부모 가정에서 오는 사회적 시선과 그에 따른 자격지심, 결핍 등을 원망으로 돌리는 이들이 있다. 자녀의 상황과 부모의 역할을 모두 겪어 본 저자는 누구보다 한 가정 자녀가 갖는 마음과 고민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고 있다.

 

이런 마음이 이혼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이혼을 선택한 부모가 미운, 양립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에게 닿기를 바라며 담담하게 조언을 내놓는다. 동시에 미처 말하지 못했던 부모의 마음을 대신 전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놓이거나 어수선한 마음을 잡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위로가 될 것이다.

 

■ 저자 박정은

평소 ‘나도 그래’라는 한마디 말의 힘을 믿기에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 나와 같은 과정을 겪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쉽게 던지지만, 그 ‘지나가는 시간’이 엄청나게 느리고 힘겹다는 것을 알기에 그동안 나의 이야기라도 들으며 들풀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견디어 달라고 말하고 싶다.

 

미지의 국가에서 사업을 시작한 아빠의 영향으로 도전하는 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한 부모(아빠)를 따라 떠난 카자흐스탄에서 배운 러시아어를 발판 삼아 LG 상사, 포스코 해외 영업 부서에서 일한 적 있으며, 비교적 늦은 나이에 중앙대학교 국제대학원 한러 전문통번역과를 졸업하여 현재는 통번역사로 일하고 있다.

 

@mindinterpreter

 

■ 차례

작가의 말_책임을 다하려는 부모와 그의 아이는 응원받아 마땅하다

 

PART 1 어느 날, 엄마가 사라졌다

엄마는 미국 갔어

고모라 하지 말고 엄마라고 불러

키우기 쉬운 순한 아이

살가운 추억이 없습니다

아빠는 유괴범이 아니에요

아는 대로 말하고 싶어요

 

PART 2 아빠가 가르쳐 준 모든 것

나의 복수

‘미안해’라는 말 한마디

끼니 해결의 기술

싱글 대디는 아이와 함께 회사에 간다

쥐와 함께 살던 집

이혼 유전자도 있나요?

비 오는 날의 클리셰

모든 게 너의 자산이 될 거야

책도 재미있어야 읽는다

티코 타고 떠나는 체험 학습

아빠의 영화 교육법

신박한 인생 정리

싱글 대디의 삶

 

PART 3 인생 엄마를 만나다

엄마 구하기

사춘기 소녀, 새엄마를 만나다

옷 입히는 즐거움

존댓말: 우리 사이의 벽

자식 대신 귀남이

엠씨스퀘어 사 주세요

한여름 밤의 가출

나의 인생 엄마에게

 

PART 4 다시 만난 세 식구

낯선 나라에서 다시 시작

카자흐스탄의 첫인상

Are you from Korea?

카자흐스탄 표류기

이방인, 카자흐스탄 법을 따르다

다름을 이해한다는 것

사라진 추억

숙식 제공, 하루 일당 10만 원

내 인생의 나이스 샷

잡초 같은 삶의 이유

 

PART 5 나를 먼저 사랑하는 일

아빠의 작전명: 기다려!

회사뽕에 취한 날들

조건 연애

잔인한 오월의 편지

나도 결혼할 수 있을까?

나를 성장시킨 두 번째 사람

천둥벌거숭이들의 결혼

가정이라는 안식처

아이는 내가 아니다

입으로 먹고사는 사주

분리 불안 엄마

메달을 따면 어머니를 볼 수 있을까요?

불쌍하지 않습니다

 

에필로그_한 부모 가정의 아이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

추천하는 글_어두운 밤 가장 밝게 빛나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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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 지음/서사원/2021년 8월/224쪽/13,800원

 

어느 날, 엄마가 사라졌다

엄마는 미국 갔어

“엄마는 공부하러 미국 갔어.”

 

엄마는 어디에 있냐고 묻는 내게 할머니와 고모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정도면 유치원생이 느끼기에 가장 먼 나라라고 여겼던 걸까. 몇 번이나 다시 물어도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할머니는 자식에게도 손녀인 나에게도 무뚝뚝한 분이었다. 할머니의 사랑 표현은 그저 유치원복을 하얗게 빨아 깃을 빳빳하게 다려 주는 것이었다. 맛난 밥을 차려 주고 좋은 옷을 입혀 주었지만 다정하게 안아 주거나 투정을 받아 주는 분은 아니었다. 엄마를 잃은 손녀는 못내 안쓰러웠지만 품에 안아 위로해 줄 줄은 몰랐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는 내가 아빠와 엄마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엄마의 부재를 그저 ‘미국 유학 중’이라고 둘러댔다. 엄마가 아주 떠난 줄도 모르고 나는 종종 청승맞게 눈물을 흘리며 묻곤 했다.

 

“그럼 엄마는 언제 공부 끝나고 와?”

 

얼마나 대단한 엄마길래 뭔 놈의 공부를 미국씩이나 가서 하는지. 똑똑하면 공부를 빨리 마치고 올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원망과 그리움이 뒤엉켜 어느 것이 먼저인지도 모르겠을 즈음, 엄마의 유학은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빠랑 엄마는 이혼했어’라고 정확히 말해 주지 않아도 나는 언제부터인가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걸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빠가 가르쳐 준 모든 것

티코 타고 떠나는 체험 학습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체험 학습을 다녔다. 그럴 형편이 못 되었던 우리는 아빠와 산 좋고 물 맑은 곳으로 나들이를 자주 다녔다. 좋은 공기를 마시러 수목원에 갈 때면 근처 왕릉과 유적지에 들러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한 번 생각해 보기도 했다. 일부러 박물관이나 체험관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나들이를 가다 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차를 멈추고 함께 보곤 했다. 그간 나는 크면서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전혀 듣지 않았다고, 그게 꽤 좋았다고 말하곤 했는데, 생각해 보니 아빠는 학업에 관한 관심을 이런 식으로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표현해 왔던 것 같다.

 

우리는 엄마가 없어도 여기저기 자주 놀러 다녔다. 화려한 장소와 음식은 아니어도 원조 감자탕 집이나 돼지갈비집처럼 동네에 입소문 난 맛집이 있으면 찾아가 보곤 했다. 맛있는 걸 먹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종종 엄마 없는 가족을 바라보는 주변 시선이 두려웠고, 아빠가 혹여 우리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창피하지는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아직 젊고 멋진 아빠를 보면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맛난 걸 먹고서 우리에게도 먹이고 싶어 데리고 왔을 아빠의 마음을 알았기에 우리는 가족으로서 팀워크를 다지며 한 팀처럼 살았다. 

 

인생 엄마를 만나다

사춘기 소녀, 새엄마를 만나다

인생 엄마를 만난 건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주류 유통 회사의 창고를 개조한 슬레이트 지붕 집에 살던 때였다. 엄마는 눈부시게 예뻤다. 엄마의 나이가 20대 중반이었으니 아름다움이 가장 꽃필 시기였다. ‘줄리아 로버츠’를 닮은 이국적인 외모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구불구불한 긴 파마 머리에 분위기 있는 브라운 톤의 눈매, 뉴트럴 계열의 옷을 즐겨 입던 엄마는 미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썰미와 감각이 남달라서 한 번 먹어 본 음식은 집에서 똑같은 맛을 재현해 만들기도 하고, 지나가다 한 번 본 옷이나 가방도 놀랄 만큼 비슷하게 만들었다. 재주 많은 잔나비 띠인 아빠의 띠동갑 여자친구다웠다.

 

사실 처음부터 그분을 인생 엄마라 여기고 마음을 열었던 건 아니었다. 아빠를 빼앗긴다는 불안감도 있었고, 그동안 큰 불편 없이 살아왔는데 이제 와 무엇 때문에 엄마가 필요한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함께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춘기가 찾아왔고 갈등은 예상한 수순이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살뜰히 챙겼다. 좋은 옷을 입히고 맛있는 것을 해 먹였다. 종종 TV에 나오는 배우들의 의상처럼 옷을 만들어 입히곤 해서 반 아이들의 눈총을 받을 정도였다. 점심 도시락으로 떡볶이나 피자를 손수 만들어 학교 후문 담벼락에서 전해 주기도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은 우리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이런 인생 역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춘기 여자애의 마음도 서서히 열렸다. 나도 커서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후에 친구에게 “사실 그분은 내 새엄마야”라고 말했을 때 그 아이의 충격 받은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만큼 친엄마 이상의 사랑과 관심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런 진심이 통해 어느 순간부터 새엄마는 진짜 내 엄마가 되었다. 우리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함께하며 나름 우정이란 걸 조금씩 쌓아갔다.

 

한여름 밤의 가출

여름밤 길거리에서 맥주 한 잔. 낭만적으로 보이는 이 장면은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밤의 내 모습이다. 몇 달에 한 번씩 집을 찾아오는 아빠와 생활고에 새엄마는 지쳐갔다. 저녁마다 반주 삼아 소주를 한 잔씩 마시던 새엄마는 조금씩 술이 늘었다. 어느 밤에는 새엄마가 술 기운이 조금 올랐는지 국제전화를 걸어 아빠와 말다툼을 했다. 생활비를 보내기로 한 날짜가 지난 것이다.

 

통화가 끝나고 새엄마는 울었다. 그날도 그랬다.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지만 새엄마의 그만두자는 말이 닫힌 방문 너머로 흘러나왔다. 10시가 넘은 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신발을 신었다. 무작정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새엄마가 나를 못 찾을 거라 생각되는 곳에서 두어 정거장을 더 지나 내렸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를 한 캔 샀다. 속상한 어른들이 마음을 풀고자 술을 마시는 모습을 종종 봐서 그런지 어린 마음에 나도 술을 마시면 속상함이 해소될 것 같았다. 그때는 신분증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고 술이나 담배를 팔 때라 맥주를 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어느 컴컴한 육교 다리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처음 마셔 본 술이라 잔뜩 취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났다. 그 밤에 갈 곳은 없고 그렇게 웃으며 집에 들어가니 엄마는 그때까지도 울고 있었다. 나도 엄마를 보니 눈물이 났다.

 

“이 밤에 말도 안하고 어디 갔다 온 거야. 한참 찾았잖아!”

“엄마, 우리 두고 가지마...”

“알았어 안 갈게. 늦었으니까 이제 자. 미안해.”

 

새엄마는 나를 자리에 뉘이고 내가 잠들 때까지 이마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따뜻한 손길이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새엄마는 몇 달을 우리와 함께 더 살았다. 동생보다 겨우 한 살 많은 맏이었지만 그래도 동생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종종 외로운 새엄마의 말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러다 한 번은 새엄마가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너는 나 이렇게 사는거 어떻게 생각하니?”

“사실...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아. 엄마는 아직 젊고 예쁘고. 아빠한테 엄마가 아기도 낳고 싶어 한다는 얘기도 들었어. 엄마만 생각하면 아빠랑 사는 건 좀 안 됐어.”

 

나는 어쭙잖게 어른 흉내를 내며 대답했다. 새엄마가 나의 의견을 물을 정도로 컸다는 게 그땐 좀 뿌듯했다.

 

다음 날, 학교에 다녀오니 냉장고에는 불고기와 반찬이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새엄마는 없었다. 서랍 위엔 잠깐 다녀오겠다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서랍 속에 있던 새엄마의 옷은 모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설마, 하는 느낌은 어슴푸레 노을이 깔리고서야 들었다. 아빠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우리 둘만 남았다고 얘기했다. 그렇게도 보기 힘들었던 아빠는 다음 주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왔다. 우리는 다시 아빠와 세 가족이 될 채비를 하기 위한 긴 여행의 짐을 꾸렸다.

 

마치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선녀처럼 그간 정든 시간이 허무하게도 나의 인생 엄마는 함께 산 지 6년이 되던 해에 우리를 떠났다. 차라리 상처를 안긴 상대를 이해할 수 없었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를 욕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하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의 입장을 너무나 이해하는 내 마음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아빠의 부재 동안 시들어가는 새엄마의 모습을 곁에서 분명히 보았기에 나와 동생을 위해 더 희생해 줄 수 없느냐고 할 수도 없었다.

 

나의 인생 엄마에게

엄마, 다시 부르려니 어색하다. 같이 살 땐 자연스러웠는데 말이야. 요즘 엄마 얘길 써. 글을 쓰며 그때를 다시 떠올려 봐도 엄마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사람이야. 이십 대 중반에서 서른 초반의 나이를 지나는 동안 ‘그 나이의 나였다면 엄마처럼 살 수 있었을까’라며 생각해 보곤 했어. 그런데 내 대답은 항상 ‘아니’였어. 나는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하는지 몰랐는데, 엄마에 비하면 나는 나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엄마가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내내 원망하며 살았을지도 몰라. 엄마를 만났기에 그래도 세상은 살아봄직하다는 걸 느꼈어. 엄마가 떠난 뒤 한동안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어. 엄마에게 마음의 빚이 많이 남아 있고 정말 감사했다고 말하고 싶었거든. 사람 많은 곳을 지날 때 어쩌면 이 많은 사람 속에 엄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똑바로 뜨고 걷기도 했어. 내가 나이 든 만큼 엄마도 나이가 들어 얼굴을 못 알아볼까 봐 머릿속으로 나이든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그렇게 한참 동안 엄마 생각을 하다 갑자기 우스워졌어. 엄마는 우리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엄마는 새로운 가정을 꾸려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그 행복을 조금도 흔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어.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두려워서 생각을 멈췄어. 그저 아름다운 나의 유년 시절 추억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언젠가 이 글을 보게 될 엄마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이제는 누구보다 엄마 자신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길 바라. 

 

다시 만난 세 식구

Are you from Korea?

급하게 카자흐스탄으로 이민을 결정한 터라 러시아어 알파벳도 숙지하지 못한 채 타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3개월간은 과외 선생님이 집으로 와서 러시아어를 가르쳐 주었다. 카자흐스탄은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을 보는 게 흔치 않았다. 나라 전체에 거주하는 한인은 100여 명 남짓이었다. 나와 동생이 다닐 학교는 이전에 한국인 학생이 다니고 졸업한 적이 있는 곳이었다. 사립 학교라서 일반 학교에 비해 학생 수나 규모는 한 학년에 10~20명이 겨우 다닐 정도로 작았다. 등록금은 비싼 편이었지만 믿을 만한 학교라고 생각했고, 다행히 그 학교에 다닐 만한 경제적 여건이 되었기에 입학을 결정했다.

 

학교에 처음 등교한 날 외국인이 전학 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전교에 퍼졌다. 아이들은 나와 동생을 보러 순식간에 각자의 반으로 몰려들었다. 그중 용기를 낸 한 명이 영어로 물었다.

 

“Are you from Korea?”

“Yes...”

“Umm... Okay...”

 

더 이상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다. 너와 나의 슬픈 영어의 한계였다. 더욱이 서로를 알지 못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더 막막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몇 마디를 더 건넸지만 뭐라고 하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수개월이 지나서야 러시아어 특유의 ‘르르르~’ 하고 떨리는 ‘R’발음과 ‘th’ 발음이 난청의 주원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부르르 떨리는 그들이 영어 발음이 귀에 익숙해질 때쯤 나도 러시아어와 아이들에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방인, 카자흐스탄 법을 따르다

카자흐스탄에는 동양인과 닮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옷차림과 태도를 조금만 바꿔도 현지인인 것처럼 거의 완벽하게 눈속임할 수 있었다. 새롭게 소속된 세상에 알맞게 내 모습을 바꾸며 나는 점점 ‘그들화’ 되었다. 정체성을 감추었던 덕분에 적응도 잘하고 번거로운 일도 덜 겪었다.

 

카자흐스탄은 두어 집 걸러 한 집이 이혼 가정이라 한국에서처럼 부모의 이혼을 감추지 않아도 되었다. 또래 아이들과 이런 민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마음 편한 일이었다. 그래도 적응하는 사이사이 주변인과 주변 환경에 나를 맞추고 진정한 내 모습을 감추는 게 어느덧 습관처럼 익숙해진 것은 씁쓸하기도 했다.

 

다름을 이해한다는 것

“저 사람 러시아에서 온 사람 같은데?”

“그냥 외국 사람 같아. 미국인지 러시아인지 어떻게 알아?”

“이제 얼굴 생김새랑 옷차림만 봐도 딱 안다니까!”

 

서양인 눈에는 동양인이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상관없다. 다 똑같은 흑발의 황인종으로 보인다고 한다.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가 보기에 서양인도 국적 관계없이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을 알고 만나고 이야기하면 비슷비슷해 보이던 면면이 새삼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다닐 때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새학기가 되어 만난 짝꿍이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와 매일 이야기를 나누고 가까워지니 뾰족한 덧니도 귀엽게 보이고 웃을 때마다 작아지는 눈매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때부터 내 짝꿍의 모습은 여느 아이들과 다른 나의 특별한 친구로 인식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니 어색하기만 했던 그곳 사람들과도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지낼 수 있었다. 더불어 그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라든지 특정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표정과 제스처를 취하는지가 보였다. 이런 정보들이 쌓여 어느새 하나의 데이터가 되었고 그들을 ‘식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아이들은 동생과 나를 신기하고 흥미로워하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현지인처럼 살다 보니 나중엔 나도 한국에서 갓 이주해 온 아이들이 어색해 보였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비슷한 생각과 시선을 갖게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빠는 카자흐스탄에서 시작한 사업이 안정되고 나서 우리를 부르려고 했따. 다만 예기치 않게 일정이 조금 앞당겨졌다. 계획에 따른 이민이 아니었건 간에 우리는 그곳에 살게 되었고 그들의 생활, 문화,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배운 문화와 언어로 먹고살고 있으니 나름대로 큰 자산을 만들기는 했다.

 

무엇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지고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 다름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다양한 상황에 처해 본 탓인지 이제 웬만한 일엔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며 이해하게 된다.

 

계기가 무엇이었든 낯선 나라에서 유학을 했다는 건 행운이었다. 비록 형편이 넉넉해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유학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새엄마와의 이별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조금은 낙후된 곳에서 시작한 생활이었지만 그 시간이 어린 내게 남겨 준 것은 참 많다. 다른 민족의 삶과 문화를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새엄마와의 헤어짐은 아팠지만 위기는 그렇게 내게 또 다른 기회를 주었다.

 

지금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언젠가 그것이 기회의 얼굴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를 먼저 사랑하는 일

불쌍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방송인 사유리가 아들을 낳았다. 이 소식은 다른 어떤 여성의 출산 소식보다 크게 회자되었다. 남편 없이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선택은 암수가 서로 정다워야 비로소 가정이 이뤄진다는 통념을 가진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나의 분신을 만나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함께할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라는 사고의 틀을 부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변해 가는 세태와는 무관하게 혹자는 아빠 없이 태어난 사유리의 아이를 불쌍하다며 안타까워했다. 한 부모 가정에서 태어나도 괜찮은지에 관한 아기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치면 세상에 태어나는 어떤 사람도 어느 가정에 태어나고 싶다고 의사를 표해서 태어난 게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하고 싶지만 일반적으로 있어야 할 누군가를 배제한 것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너 혹시 우리집에 태어나고 싶니?’ 하고 의견을 물어 출산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니까.

 

나는 사람들에게 한 부모 가정의 아이를 ‘불쌍한 사람’으로 보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종종 어려움을 겪기는 하지만 당신과 비슷한 비율로 기쁜 날도 슬픈 날도 있으니 가엾다는 불쌍한 시선은 거두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간 한쪽 부모님 없이 고생 많았다며 애정 어린 말을 건네는 사람에게 눈을 치켜뜨며 ‘내가 뭐가 불쌍해요?’라고 되받아칠 것은 아니라고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이런 말은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니 적당한 선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예, 그래도 이제는 괜찮아요’라며 짐짓 밝은 표정을 지으면 된다. 이래야 상대도 안심하고 나도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를 불쌍하게 볼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와중에 행운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쉽게 평가하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자. 스스로 나의 삶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어떤 면에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남들보다 조금 더 고생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쨌거나 누구의 삶이 힘들었냐 아니냐는 상대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유리의 아이가 불쌍하다의 전제는 ‘그 아이에게 아빠가 있었다면 없는 것보단 좋았을 텐데’라는 사고에서 시작한다. 무조건 있어서 좋은 ‘무엇’이라면 없는 것이 안타깝겠지만 가정에 따라 없느니만 못한 구성원도 있다. 그러니 ‘있으면 좋다, 없으면 나쁘다’라는 이분법 논리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사람들의 우려에 사유리는 당당하게 말한다. 아들이 어느 정도 큰다면 자신이 진정 불행한 사람인지 행복한 사람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그때까지 엄마로서 아이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말이다.

 

한 부모 가정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상 가정’대비 어려운 삶을 사는 게 평균적이다. 그래서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임을 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완벽한 삶이 주어지진 않으며 어떤 면이든 부족함은 지금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때로 부족함이 동력이 되어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불쌍하다, 불쌍하지 않다, 그건 남이 아닌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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